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에서 김원봉, 양건호, 한봉근, 김옥 등 모두 13명으로 조직되었으며 선거에 의해 김원봉이 단장을 맡았다. 이들은 당시 국내외 여러 곳에서 항거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너무 미온적이어서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고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독립운동을 하고자 결의하였다. 그래서 본거지를 북경에 두고 단원들을 서울과 도쿄에 잠입시켜 일본 관리를 암살하고 관청을 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박재현
1920년 9월 13일 중국인 책장수로 가장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책을 파는 척 하다가 서장을 즉사 시키고 경찰 다수에게 부상을 입혔다(1920년 9월 22일 옥사함)
최수봉,양건호, 김옥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장이 훈시하고 있는 곳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실패하고 경찰서를 폭파시켰다. (체포후 사형당함)
김익상
1921년 9월 12일 북경에서 폭탄 2개를 가지고 들어와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여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북경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후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을 저격하고는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
김상옥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이를 쫓는 일본경찰 다수를 사살하였다. 포위망을 몇 차례 뚫으면서 일본경찰에 많은 피해를 주게되자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총알이 없어지자 마지막 남은 한발로 34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인 애국단의 활동
조직배경
1926년 12월 2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 선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며 김구선생은 중국과 우의를 높이고 일본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봉창 의사
이봉창은 1931년 1월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상하이로 떠나 갔다. 다른 독립운동 지사들은 이봉창을 의심했으나 김구선생이 한인 애국단에 가입 시켰다. 김구선생과 이봉창은 일황을 저격할 계획과 준비를 하고 12월 16일 일본으로 건너갔다.이봉창은 1932년 1월 일본 천황 히로히또가 행사에 참석했을 때 수류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0월 10일 사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은 고향인 예산에서 육영사업에 종사하다가 23세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윤봉길은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요인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다. 이는 우리민족과 중국국민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붙잡혀 1932년 12월 19일 일본에서 총살되었다.
독립국가는 자기 나라의 영토를 지키고 주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남의 나라에 세워 졌기 때문에 군대를 두어 무장 활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 단체들을 통합하여 정식군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돕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장 독립운동
임시정부의 무장 독립운동은 군사활동과 의열 투쟁의 두 각도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군사활동은 임시정부 초기부터 군사관계 제 규정을 만드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군대 조직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주 지방의 독립군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에 두어 지원하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중국 정부와 친해진 것을 계기로 광복군 조직의 기초를 다져 나가게 되었다.
광복군의 창설 및 활약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 독자적인 무장 항일 운동을 하던 독립군들은 통합조직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주변국가들의 비협조와 일본의 방해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강한 군사력을 지닌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을 더욱 전개할 필요성에 따라 1940년에 광복군을 창설 하였다. 광복군은 임시정부 산하의 정규군으로서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어 광복군은 이미 1938년에 조직되어 독립전쟁을 벌이던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여 3개 지대로 전력을 강화하였는데 광복군의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고, 참모장은 이범석 이었다.
시대적 배경
1937년에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략하여 중일 전쟁을 일으키자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일제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 포고문을 발표 연합군의 일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광복군의 활약
광복군의 1.2 지대는 인도, 미얀마 전선에 출정하였고 2지대중 일부는 미국의 OSS라는 특수부대와 합동작전을 펼쳤다. 3지대는 중국에 파견된 일본군 중에서 한국인들을 복귀시키는 작전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광복군은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실현해 보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조선인 출신 일본군
정일권 만주군관학교 봉천5기 일본육사 54기 만주군 헌병대위
백선엽 봉천9기 만주군 간도특설대 중위
이한림 신경2기 일본육사 57기 만주군 중위
김석범 봉천5기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신현준 봉천5기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원용덕 만주군관학교 교의 중령
김창룡 관동군 헌병교습소 헌병오장
신경2기(수석 졸업) 일본육사 57기(전체3등 졸업)
만주군 중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
누구에게...??
소프라노 김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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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2009-11-20
달빛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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