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내용보기]
제목   300년 후의 역사 교과서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15-12-03 오전 11:15:00
e-mail   lee.jee.uk.wgs@gmail.com
내용
= 어느 토론방에 올린 글 ==

300 년 후의 역사 교과서

지금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이 한창인데 우리 모두 “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니라”라는 솔로몬의 지혜를 떠 올릴 필요가 있다.
300 년 후의 역사 교과서는 지금의 현대사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것이다. (단 단어의 취사선택 등으로 10%의 오차는 있을 수 있으며 제 6 항에 대해서는 허구임을 밝혀 둔다) 필자는 역사가는 아니며 아마츄어 역사소설가이고 그저 역사 책을 두루 읽어 서술의 줄기만은 알고 있기에 써 본 것이다.

1. 해방 그리고 정부수립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36년만에 해방되었다.
다만 그 원인은 스스로의 힘이 10%라면 미국과 소비에트연방 양국의 힘이 90%였고, 특히 그 후 100년 간을 세계사의 주도국이 되는 미국의 힘이 컸다.
미,소 양국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관할을 위해 북위 38 도선을 경계로 그었고 이것이 남북분단의 경계인 동시에 냉전체제라 부르는 45년간의 민주진영/공산진영 간의 국제적 경계선 역할을 하였다.

3년 뒤 UN감시 하의 총 선거가 실시되었고 소위 제 1 공화국이라 일컫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이는 38도선 북쪽에서 공산주의 정권을 세울 의도를 가진 친소 그룹이 UN감시단의 입국을 거절함으로써 38도선 이남에서만 실시된 한국역사 최초의 민주주의 정부였는데, 일부 인사(상해임시 정부 주석 김구 등)들이 남한만의 선거에 반대해 남북합작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남한 만이라도 조속히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승만의 주장이 옳았음이 이후 입증되었다.
북에서도 정권이 들어섰으나 UN의 승인을 받지 못한 정부였고, 이는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UN군이 남한 정권을 위해 다국적 군대를 파견하는 합법적 근거가 되었다.

2. 6.25 사변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38도선을 넘어 전면전쟁을 일으켰다. 북조선 정권의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3년간 수많은 인명피해, 도시파괴, 산업시설의 잿더미화를 초래 했지만 사변 전과 후의 경계는 큰 차이 없이 끝났다. 미소 냉전의 한 축인 공산진영의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이 두려워 표면에는 나타나지 못하고, 암암리에 남침의 방조 내지 사주 역할만 했는데, 전쟁이 UN 다국적 군 참전으로 공산정권이 거의 압록강까지 밀리게 되자 중국을 앞세워 UN군을 저지했다.
김일성은 패배에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패전의 원인을 같은 공산당 내의 반대파(박헌영 등)에 덮어씌워 정적 제거를 위해 이용하였다.

3. 4.19 의거
만년의 이승만은 고령으로 인해 국정관리 능력이 산만해 졌다. 또 후계자 육성에도 소홀했다. 이 틈을 타고 권력형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렸고 민심이 날로 이반되어 갔다.
1960년 3월 15일 시행된 정부통령 부정선거로 인해 도화선이 당겨진 학생 데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정부가 발포명령으로 대응하자 사태는 겉잡을 수 없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이 승만은 하야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4.19 때문에 집권한 장면 정권은 소위 혁명의 주체도 아니었거니와 격변기의 혼란을 수습할 의지와 관리능력이 없었고 사회는 4.19 전과 차이 없는 혼란상을 보여 결국 5.16 혁신을 초래하였다.

4. 5.16 혁신
1961년 박정희,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혁신적 이념을 가진 군사장교들이 제 2공화국을 무력으로 정지시키고 “국가재건” “민족중흥”을 내걸고 권력집중 형 과도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 사건의 성격은 학문적으로는 쿠데타이지만 이후 단시간(25년) 내에 3류 국가 수준에서 일류국가 수준으로 경제,사회 발전을 달성하였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 하다.

경제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달성하였고(별표 그래프 참조) 대외적으로 무역, 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수출 주도형 교역확대를 꾀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또 북한이 중공업정책으로 일관하여 성장이 정체된 반면 한국은 초기 경공업 육성으로 민생문제를 해결한 후에, 중화학공업으로 변신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여 성공하였다.
또 남쪽은 시장경제체제로 일관하여 미국, 구라파의 거대 시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북쪽은 같은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실용주의를 택해 사실상 시장경제 체제로 변신한 중국공산당과 달리, 이념에 고착된 경직된 사고로 거대 시장을 활용할 기회를 놓쳤다.
(註; 3공화국 이후 2020년까지의 대통령들의 이름은 300 년 후의 역사교과서에는 아예 한 명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5. 대일 관계
5.16 혁신을 일으킨 주체세력은 한일국교정상화(1965년)조약을 통해 과거사를 정리하고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일본에 대한 청구권 자금으로 경제근대화를 일으키는 데 적극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 외교 노선은 뒤를 이은 정권들의 명분외교 노선으로의 회귀로 인해 적기에 외교정책이 안정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였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중앙청 폭파해체, 위안부 문제 등등의 해프닝이 그 사례이다.
이는 과거 조선시대에 최명길의 반대편에 섰던 척사주의, 실학의 반대편이라 할 예송논쟁, 고종 때의 폐쇄외교와 그로 인한 국권상실 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공리공론(空理空論), 알맹이 없는 사변(思辨)적 명리론의 일종으로 시대착오적이라 할 수 있다.

6. 통일
2021년 73년만의(이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수명과 같은 햇수이다) 세습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킨 북조선 군사평의회는 즉각 대한민국정부와 통일원칙에 합의하여
1)시장경제체제로 통합하되 북쪽은 토지사유화는 택하지 않고,
2) 7년간의 과도기 동안 북한은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모방하는 자치정부를 유지하되 국방,외교권은 남쪽에 넘기고,
3)2022년 예산은 전년도의 2배로 책정하되 늘어난 부분은 남쪽부담으로 한다. 그리고 2023년 이후 매년 미화기준 50% 씩 예산을 증액하며 2022년 기준 늘어난 금액은 역시 남측부담으로 한다.
4)총리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 2원집정부적 대통령제를 채택하되 대통령이 남쪽에서 되면 총리는 북쪽에서 나오는 식으로 15년 동안은 번갈아 대통령, 총리 직을 교대로 수행한다.
5)대외 국명은 Republic of Korea로 하고 국기는 태극기로 한다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한 통합 안을 공동 발표하였다.
이로서 통일이 사실상 이루어졌고 2028년 완전히 동일 체제로 통합되었다..



[나도 한마디]
이름 내용 비밀번호 [등록]

제목 등록일자 등록자 조회수
   300년 후의 역사 교과서 2015-12-03 이지욱 1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