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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외갓집 추억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14-11-13 오후 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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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한국에 온 김에 경주와 안강 사이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가게 되었고, 가는 길에 요번에는 꼭 들려야 하겠다 마음먹은 곳이 있었다.

대창면 운천리 임하골이라 불리는 산골에 있는 옛 외할머니가 살던 동네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졸업 때 까지 여기 사시다가 그 후 거기서 백리 떨어진 화북면의 어느 곳으로 이사 가셨지만 내겐 화북면 보다 더 추억이 깊게 벤 곳인데, 그 뒤 갈 일이 없어 50년 동안 안 가던 곳이었다. 대창면 까지는 공장들이 흉물스럽게 들쑥날쑥 들어서서 짜증이 났지만 대창면을 지나자 금방 눈에 익은 모습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내 머리와 가슴은 금방 50년전으로 줄달음쳤다.
당시 나는 중학 1년 여름 방학,
까닭 모르게 치마로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하고 대구신암주차장에서 버스에 오른다.
“오라잇”하는 차장 누나는 탄 사람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어, 외 발로 버스 문 옆 디딤 난간에 간신히 서 있다.
어머니는 왜 내가 멀리 가기만 하면 까닭 없이 우시나 생각하면 마음 속이 울적하지만, 차가 시내를 벗어나, 들판과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오자 말자, 나는 빨리 외할머니 집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으로 설레어, 어머니의 눈물 닦는 모습은 금방 잊어버린다.
차는 한참 후 중간 정착지인 하양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버스는 꽤 오래 서있기 때문에 곧 장사군들이 몰려든다.
“능금 사소! 능금!” 팔려는 품목은 주로 흰 실을 X자로 엮어 10개 단위로 묶은 사과이다. 그 중 다수는 열린 창문으로 사과 묶음을 들이 밀지만, 상당 수는 아예 버스 안으로 진입하여 팔려고 열을 올린다. 지불능력이 없는 나는 그들의 관심 밖이고 나도 어서 버스가 다시 출발 하기만을 기다린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대기 시간이 지나 마침내 출발한다.
드디어 버스는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들어선다. 강이 나타난다. 다리가 좁아서 저쪽 차량이 다 건너와야 출발할 수 있다.
마침내 버스는 대창면에 도착한다. 거기서부터는 인가가 거의 없고 논, 밭 아니면 과수원인데 버스는 좀 더 간다. 그리고 종착 역이다.
나는 한 시간 가량 더 걸어야 한다. 좌우는 논 아니면 밭. 왼쪽 논 저 가운데 농약을 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들어온다. 외삼촌 같다. 아니 분명 외삼촌이다. 얼마 전 군에서 제대했다는……
나는 달려가 “아재……!”하고 부른다. 농약 치던 손을 멈추고 이쪽을 힐끗 본다. 그러더니 마스크를 내리고는 “왔구나. 니 먼저 가 있어래이. 내 이거 마자 끝내고 가꾸마.”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때부터 걷는 듯, 춤을 추는 듯 신이나 오솔길을 좌왕 우왕하며 걷는다.
숲이 나오고, 숲을 지나면 개울이 나온다. 그 개울을 죽 따라 걸으면 마침내 개울 왼쪽에 거대한 성채처럼, 담을 순 돌로만 쌓아 올린 높다란 곳에 초가집이 덜렁 위용을 자랑한다.
나는 징검다리를 건너 후다닥 언덕을 뛰어 올라 간다. 싸립문은 열려 있고 집은 텅텅 비어있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는 밭 매러 간 모양이다. 나는 상관 않는다. 빈 방에 책보를 던져 넣고 얼른 부엌으로 간다. 거기서 사발 하나를 꺼내 도로 개울로 내려간다. 거기서 돌을 뒤진다.
꼬물거리는 가재가 눈에 들어온다. 금방 큰 놈 대여섯 마리를 잡는다. 그걸 사발에 담아 들고 도로 집으로 올라 온다. 부엌으로 가 1차로 구워먹을 가재 두 마리를 꺼낸다. 다황(성냥)이 눈에 안 띈다. 상관없다. 부엌 옆에 쌓인 나뭇단에서 가지를 두 개 분질러 큰 방에 붙은 작은 방으로 간다. 거기 청동화로 속에 수북이 쌓인 재를 들치니 불씨가 나타난다. 그걸 집어서 다시 부엌으로 와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가재를 굽는다. 잘 익은 가재를 집어 사발에 담긴 냇물에 한번 행궈 입 안에 넣는다.
아 고소한 맛! 두 마리를 금방 해치우고 더 구울까 말까 망서리다가 사발을 덮어놓고 할머니를 찾아 나선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겨울방학이든 여름방학이든 방학 이틀 째엔 어김없이 이곳에 왔으니 할머니가 어디 계실지는 척 꿰뚫고 있다. 시내가 끝날 때 까지 주욱 따라 올라가면 말밤이 풍성한 작은 못이 하나 나오고 그 옆에 고추밭이 있다. 할머니는 어김없이 거기 계신다.
“아이구, 우리 손자 왔구나! 그 백태(교복 소매 끝에 달린 백삼선을 지칭)는 뭐꼬? 벌써 고보생이 됐나?” 외삼촌은 아들 형제 없이 위로 여형제만 넷이고 아이는 없으니 외할머니는 외손자들을 귀여워할 수 밖에……나는 안다. 외손자들이 여럿이지만 그 중 나를 제일 이뻐 한다는 걸…. 왜냐하면 한 때(6.25 전) 아버지는 낮에는 우익세상 밤이면 좌익 빨치산 세상이 되는 고향인 양동마을을 피해 이곳으로 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까…..
나는 같이 있던 외숙모의 호미를 빼앗아 반은 재미로 밭을 매어 본다. 나는 재미로 하는데 대견한 양 바라보시는 외할머니의 시선이 쑥스럽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나도 아는 이웃 집 아이가 소를 낮 동안 먹였다가 데려다 준다. 외할머니의 애지중지하는 누런 암소이다. 그 새 새끼를 낳아 송아지 한 마리가 따라 다닌다.
“너는 내일 아침부터 한 달 동안 내 차지다!” 나는 속으로 환호한다. 내가 외갓집에 오면 하는 일중 최고로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 소 먹이는 일이다. 아침에 산에 데리고 나가 저녁 때 데리고 오면 된다. 중간에는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거나 동네 아이들과 씨름 등등을 하며 딩굴딩굴 논다. 19세기에 태어난 외할머니는 “소를 먹이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의 대처법”까지 일러 줬지만 전혀 불필요하다. 딱 한번 늑대 두 마리를 만난 적은 있는데 놈들은 우리 아이들 모두와 소떼의 합이 어마어마한 군세인 걸 보고 즈레 도망가 버렸다.
반찬이 딱 두 가지인 저녁을 먹고 나니 어두워진다.
아재가 멍석을 깔아 놓고 벼껍질 무더기로 모깃불을 태운다. 연기가 맵다. 그래도 모기는 달려든다.
동네 어른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쉰다.
“치우기가 저래 날고 있으니 가물이 안 들 턱이 있나…….?”
아마 혜성이 나타나 가뭄이 계속된다는 얘기 같은데 나는 관심 밖이다.
이윽고 동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는 모기장을 친 방 안으로 들어와 호롱불을 밝힌다.
호롱 불을 가운데 두고 외숙모는 베틀에 앉고, 할머니는 대마껍질을 잘게잘게 쪼개어 북실을 감는다. 철거덕 척, 철거덕 척, 베짜기가 시작된다.
밤이 이윽할 무렵, 마당에서 뭔가를 하시던 아재가 “승상할매 오셨니더.” 하고 할머니께 아뢴다.
승상할매는 내가 외갓집에 도착하는 날은 으례 나타나시는 분이다. 산을 두 개나 넘어야 올 수 있는 먼 마을에 사시는 분이다. 승상할매라 불리는 이유는 그 가문에 조부 때에 정승,판서가 나왔다고 해서란다.
밤에 산을 넘자면 으례 마주치는 납딱바리(스라소니) 얘기를 하셨다. 오늘도 만났는데 조약돌을 주워 손으로 부벼 뒤로 던지니 따라오다 서고, 따라오다 서고 하다가 마을 불빛이 보이자 사라졌다는 얘기……
오늘도 전처럼 얇으리한 소설책 두 권을 가져오셨다. 겉껍질이 다 헤진 “혈의 루” 같은 신소설류 인데 맞춤법이 영 엉망인(그 당시 내 기준으로) 책인데 그나마 세로쓰기로 되어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는 낭독을 시작한다. 턱을 괴고 가끔 곰방대를 툭툭 두드리면서 듣는 게 두 분들의 낙이다.
몇 시간이 지났나? 자정이 훨씬 넘은 것 같다. 내가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탁 덮는다.
“허허, 젊으니까 다르네. 책 한 권을 하룻밤에 후딱 읽어버리네….”
승상할매가 대견해 하자, 우리 할머니는 외손주 자랑을 열심히 늘어 놓는다.
나는 책 한 권을 더 읽어드릴까 하다 밤을 샐 것 같아 그만두고 내가 가져간 월간지“학원” 을 뒤적거리다가 끝 부분 “유머”란에 있는 꽁트 한 토막을 읽어드린다.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보고 남학생들이 ‘호박 꽃도 꽃이라고…’하고 비웃었다. 그러자 여학생들이
‘멸치도 고기라고…’하고 응수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두 할머니는 그냥 박장대소를 하신다.
30대 초반에 훈장을 하시던 외조부가 돌아가시고 40여년을 청상과부 노릇하며 4녀 그리고 마지막에 1남(그러니 동원할 노동력이 없었다) 을 길러낸 외할머니의 고독한 인생여정을 그 당시 내가 알 도리가 없었다.
이튿날이 되었다. 아직 바깥이 희뿌연 새벽인데 할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오늘 할 일에 대한 주의사항을 죽 읊으시는데 근 30분이 걸린다. 나는 그걸 묵묵히 듣고 있는 외삼촌의 인내심에 놀란다.
나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내 자신의 스케쥴이 있다. 오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자그만 소나무 숲이 있다. 거기 달려가서 발로 풀을 툭툭 찬다. 아니다 다를까 거의 다 자란 홍굴애비(방아깨비)가 툭툭 튀어 오른다. 그걸 여러 마리 포획해 집으로 돌아와 쌀독에 묻어 놓는다. 한 마리만 꺼내 아침밥을 짓는 외숙모 옆에 쪼그리고 앉아 구워 먹는다. 그 기막히게 고소한 맛….
아침밥을 먹는다. 반찬은 늘 두 가지였는데 오늘 하나 더 있다. 어제 수박을 먹었는데 껍질을 버리지 않고 껍질에 붙어있는 흰 부분-그걸 잘라 무치어 놓았다.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조반을 마치고 소를 몰고 동네 아이들과 무리를 이루어 산을 향한다. 시간 반쯤 걸었을까….풀이 많은 중턱에 소를 풀어놓고 우리는 놀이에 열중한다. 내가 가져온 “학원”잡지와 만화 한권은 시골 아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다. 개구리를 잡아 구워먹고, 메뚜기를 잡아 볏줄기에 꿰고….
우리 일행 중 나이 꽤나 먹은 형들이 나와 또래의 시골 아이에게 씨름을 시킨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티지만 시골에서 농사일로 뼈대가 굵은 아이를 당할 수는 없다. 나는 넘어진다. 좀 서운해 다시 하자고 대든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 나는 좀 시무룩해서 다른 놀이에 열중한다.
이런 날들이 방학 내내 일어나지만 지루하거나 심심하지 않다.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사이, 드디어 차가 동네 어귀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려 걷는다.
급경사로 이루어진 외갓집 뒷산이 눈에 들어온다. 단풍이 노랗고 빨갛다. 언젠가 저 산을 외삼촌과 빨리 오르기 시합을 한 적이 있다. 외삼촌은 군대를 갓 제대했고 나는 중학생이니 당연히 내가 졌지만 몇 걸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햐!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되게 빠르네. 어른 되면 축지법도 쓸 수 있겠다. ” 하시며 내 어릴 때 얘길 들려주었다.
내가 겨우 걸음마를 할 땐데 나무하는데 데리고 갔다. 나무를 다 하고 나서 일어서려니 나뭇짐이 너무 무거워 지게 작지를 짚고 아무리 일어나려 발버둥쳐도 일어설 수가 없더란다. 그런데 네 살 먹은 내가 “내가 밀어줄까” 하더니 뒤로 가 밀었는데 벌떡 일어나 지더라는 것….. 아마 그때 외삼촌은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없는 힘의 임계 수치를 왔다갔다한 모양이다.

그 생각을 하며 멋 적게 웃고 있는데 어느 새 옛 외갓집 앞에 섰다.
그 당시 웅장하게 보였던 돌담은 온데 간데 없고 시멘트콘크리트 담장이 꽤 높게 쳐져 있다. 징검다리 대신 콘크리트를 교량처럼 해서 이어놓아 건너가고픈 생각이 없어졌다. 정든 소 외양간엔 승용차 한 대가 꼴사납게 서 있다. 시냇물도 많이 탁해져 있었다. 마당 너머에 있던 밭 만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선 감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그 감나무에다 나는 당시 유행하던 만화 “앵무새 왕자”흉내를 내며 배추뿌리 깎는 칼로 칼 던지기 연습을 며칠 동안 한 적이 있었다.
마당은 외할머니 예순인가 칠순 잔치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법석거리던 넓은 터 인걸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좁았다. 당시 동네 아줌마들이 멋지게 춤들을 추며 빙빙 돌아가는데 우리 어머니만 쪼막춤(팔만 까딱거리며 걷는)을 추길래 나는 부끄러워 얼른 어머니 치맛자락을 끌고 열외로 끌고 나온 기억이 있다.
그 집에 들어가는 대신 마지막 인가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한 청년이 밭에다 줄 거름을 옮기고 있었다.
“할만 항교?” 내가 말을 건너자 다가와 인사를 한다. 나는 옛날 50년전에 외갓집이 있던 곳이라 한번 들렸다 했다.
“외가라….그럼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정자 **자 **자”
“가만 있거라. 우리 어른이 아실지 모르겠네” 하시며 집 안에 대고
“어무이요. 한번 나와보소” 한다.
곧 70 이 훨씬 넘어 보이는 그러나 아직 정정한 할머니가 나오신다.
“이 어른이 옛날 외가가 여기라 하시는데 성함이……”
“정자 **자 **자라 합니더” 내가 다시 되풀이 하자 할머니가 말한다.
“아이고 우야꼬? 내가 옛날 아랫집 윗집 살던 사람인데….. 근데 그 양반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이곳으로 와 바로 요 위에 묻혔는데…… 얼마든지 더 살 나인데 그만 아쉽게……”
“머 머라꼬예? 돌아가셨다고예?”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처럼 정신이 아득해 진다. 하기사 나 보다 10여세 위가 아니던가….. 그렇더래도 벌써 돌아가시다니….. 내가 아주 귀국하면 제일 먼저 찾아뵐려 했던 분인데…….
“요 위에 못 옆에 가면 묘 두 기가 있는데 거기 비석도 새겨져 있니더…..”
나는 축 늘어진 걸음으로 그리로 향한다.
내게 눈에 익은 못이 나온다. 거기서 자주 말을 걷어 쌈을 사 먹던 곳이다.
무덤이 있다. 다가가 살펴보니 “처사 오천정씨……”라 새겨져 있다. 꿇어앉아 둥근 묘에 난 풀을 보자니 절로 눈물이 북받쳐 오른다.
외국에 있다는 걸 핑계 삼아 소식을 뚝 끊은 못난 조카의 죄를 용서하시라 빈다. 무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울음을 그치고 살피니 이름 모를 작은 보라색 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침내 돌아선다. 못 가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휘이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사라진 허공에는 흰구름 한 무리가 떠 가고 있었다.



[나도 한마디]
이지욱  그 때 어른들 대부분은 가난했고,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철모르는 사춘기 우리들에겐 "우리 모두가 王이었던 시절"이었지... 능금-그 당시 사과의 대종은 국광 아니면 홍옥, 그런데 "홍옥"의 그 쌉살하고 풍부한 즙은 요새 "부사"가 도저히 딸아갈 수가 없다! 2014-11-24 오전 10:46:00 x

.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하얀 반소매 하복 대신 여전히 시커먼 동복을 입고 다니곤 했었지. 지욱이의 모친이 아들을 고향에 보내면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가 물론 친정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거 교복도 한몫 했지 않았을까 싶네만...훤하게 잘 생긴 아들에게 산뜻한 하복을 입혀 보내지 못해서.... 2014-11-22 오전 1:30:00 x

봉영  나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방학 때마다 놀러갔던 선친의 고향에서 소물이, 가재잡기 등등 어렸을 적 추억이 자네와 공통점이 많은 것 같군. 경중 1학년 여름방학 때 신암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하양에서 능금과 삶은 계란을 사먹은 것도 비슷하고... 그때 여름방학은 6월 더위가 시작되자마자 곧 실시되었는데 2014-11-22 오전 1:11: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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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갓집 추억 2014-11-13 이지욱 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