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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캄보디아 단편모음 9편
이름   권태인 등록일   2011-11-12 오후 1:37:00
e-mail   tikwon@gmail.com
내용
Episode 9
犬猿之間

역사상 캄보디아를 침략하고 수탈한 나라들은 비단 베트남뿐 아니라 태국(시암)이 가장 심하여 1431년에 결국 앙코르 왕국을 멸망시키고는 1863년 프랑스가 점령할 때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했었고, 또 프랑스는 1953년 독립 때까지 90년을 지배하면서 과중한 세금부과, 고무, 커피, 후추 등의 농장에 강제노동 및 고급목재, 귀금속 등을 수탈했었지만 캄보디아인들은 태국과 프랑스에 대해서는 그래도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물론 태국이 캄보디아를 통치한 16세기-19세기 사이 같은 남방불교 문화와 산스크리트 언어권으로 동질성이 많은데다가 캄보디아의 왕가가 “롱벡”이나 “오동” 등에서 그래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국민들이 특별하게 반감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왕가에서나 또는 다른 민족적인 지도자가 홀연히 나타나 국민들을 일으키지도 않았었다.
이 사이에 동쪽은 역시 베트남-뉴엔(院)의 침략을 받아 거의 베트남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1600년에는 태국군에 쫓겨 롱벡에서 도망한 캄보디아의 샤타왕이 보호를 받으려고 뉴엔(院)의 남부 집정관인 “사이붕“의 딸과 결혼을 해야 하기도 했다.
한편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은 1113-1150년 사이 앙코르 왓을 세운 수르야바르만 2세 때 챰족(베트남 중부지방의 챰파 왕국)의 침략이 산발적으로 시작되었고 1177년 자야바르만 7세 때 대규모 침략이 있었으나 똔레삽 호수에서 있은 水戰에서 격퇴되고 말았었다.
때가 마침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우기 동안 메콩 강으로부터 호수로 모여들던 물이 다시 메콩 강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때로 자야바르만 7세는 이 역류하는 물살을 이용하여 수전을 펼쳤던 것 같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급류를 이용하여 왜군의 대 선단을 물살에 밀려 서로 좌충우돌하게 하고 화공전을 펴서 격퇴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 수전을 기념하여 지금도 똔레삽 호수의 물이 역류를 시작하는 때면 제일 큰 국가적인 행사 “물축제”가 일주일간 계속된다. 물 축제 때는 보트 경기가 펼쳐지는데 많은 군사들이
노를 저어 물살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경기이다.
빠른 속도의 배 船首가 물살에 밀려가는 배의 측면을 부딪치면 부딪친 배는 부서지거나 전복하기마련이다.
물살이나 바람에 밀려가는 배는 자연히 옆으로 물살이나 바람을 받게 되어있다. 또 자야바르만 7세는 마치 우리 역사의 광개토 대왕처럼 캄보디아 영토를 멀리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중부, 그리고 서쪽으로 미얀마까지 넓힌 국가적 영웅이었으며 국내적으로는 유명한 앙코르 톰을 축조하였고 또 대승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정하기도 했었다.
챰파 왕국은 결국 15세기에 베트남 북부의 뉴엔(院)왕국에 패하여 멸망, 산발적으로 남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계 민족으로 2세기경 중부 베트남에 자리 잡을 때부터 적어도 10세기 때까지는 인도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를 믿었다가 그 이후 말레이시아 이슬람교로 바뀌어 지금은 모두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캄보디아에는 약 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러한 역사상의 이벤트는 베트남인에 대해 캄보디아인들이 자존심과 우월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베트남인들을 야만인(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1863년 프랑스 식민통치 때부터 지금까지 베트남의 영토 잠식과 영향력은 캄보디아에서 무시할 수 없었는데 .......

베트남 공산당의 인도지나 합병 정책.
1. 베트남이 주도한 인도지나 공산당과 그 정치노선
1930년 인도지나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호치민에 의해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첫째, 당의 이름 그대로 인도지나 3국의 공산당을 모두 포함하는 뜻을 갖고 있다.
당의 명칭을 이렇게 명명한 것은 호치민의 정략적인 의도가 매우 깊은데 국제적인 공산주의자인 레닌도 유럽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았음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베트남 공산당이 인도지나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바로 인도지나 3국,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포함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인도지나 공산당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도지나 3국을 다 공산화하여 다스리는데 있는 것이었다.
둘째, 인도지나 공산당의 강령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인도지나”의 구축에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강령은 인도지나 3국의 독립 투쟁을 고무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도지나 3국이 베트남 공산당의 강령을 거부할 명분 없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당의 주 임무는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베트남, 캄보디아 및 라오스가 독립을 하는데 있어 베트남이 앞장을 선다는 것이었는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및 기타 분야에서 이 3국이 통합적인 연방 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이 투쟁의 지휘는 당연히 인도지나 공산당이 하는 것으로 즉 (베트남)한 민족, 한 국가, 한 군대가 한다는 의미이다.
1930년 창당 이후부터 북 베트남은 그들의 군대와 당원들이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서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훈련을 해 왔었다.

2. 1930-1970년 사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펼친 월맹의 인도지나 연방화 정책

a. 1930-1945년 사이
이 초기 15년 동안 베트남은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서 활동을 하기는 했었지만 취약점이 매우 많았었다.
우선 당원의 수가 적었는데 다가 당시 거의가 본국에서 대 프랑스 독립운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또 베트남 자체가 통일이 되어있지 않았었다.
당시에 베트남은 3개로 갈라져 있었는데 통킹, 안남, 그리고 남부 코친 차이나였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 인도지나 공산당은 베트남만의 공산당 이었고 조직이었으며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전혀 공산당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또 베트남 공산당원들은 자국에서 활동하기에도 바빴었다.
당시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북쪽 특히 중국의 광동성과 인접한 지방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캄보디아나 라오스까지 파견할 당원들이 부족하였다.
또 당시 프랑스 식민 치하의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게다가 베트남을 싫어하는 편이었으므로 그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심지어 예로부터 캄보디아에 살고 있던 소수 베트남인들 조차 베트남 공산당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b. 1945-1954년 사이
1940-1941년 사이에 호치민이 이끄는 인도지나 공산당은 중국과 인접한 국경 지방에서 대 프랑스 무력투쟁을 펼치면서 베트남 독립 동맹회(월맹)를 결성하였다.
1945년 3월 9일, 당시 인도지나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은 이 지역의 프랑스 식민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인도지나 3국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쿠데타를 종용하고 독립선포를 하게 하였는데 월맹은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대민 영향력을 넓히면서 많은 동조자들을 포섭하고 월맹 측에 가담케 하였다.
1945년 8월 19일에 일본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호치민은 프랑스가 다시 진군하기 전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선포하는 8월 혁명(깍망탕땀)을 봉기하였다.
나중에 월맹은 일부 당간부들을 캄보디아와 코친 차이나(다낭 이남의 남부 캄보디아 및 베트남으로 프랑스가 1859년 처음 점령한 지역에 붙인 국명)에
파견한다.
월맹의 첩보원들은 남부 캄보디아(캄푸치아 끄롬)에 침투하여 캄보디아 사회에 순응하며 중산층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당시 일본에 의해 잠시 독립하였던 몇 달간 캄보디아의 수상으로 취임했던 민족주의자 손뇩탄(孫玉成)이 일본 패망 후 다시 진주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프랑스로 유배되자 뒤를 이은 민족 지도자들 즉, 팍치은, 챠우생, 침틈, 유찬, 체아옴 등과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이들 캄보디아의 민족 지도자들을 앞 세워 월맹은 투쟁 위원회를 조직하였지만 나중에 이들은 모두 프랑스 총독부에 투항하여 버렸다.
그러자 월맹은 다른 캄보디아 지도급 인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캄보디아에 살고 있던 베트남 인들에게도 접근을 하였다.
한편, 월맹은 캄보디아의 남서부 및 남부 지역에서 사람들을 포섭, 데려다가 교육 훈련을 시켜 그들의 “인도지나 연방” 정책의 전방 도구로 삼기도 했다.
반면에 프랑스도 만만치 않아서 친 프랑스의 첩자들, 경찰, 군인 등을 월맹의 조직 내에 침투시켜 첩보 활동을 했다.
그러자 월맹의 조직 내에는 이들이 납치해서 훈련시킨 당원들과 프랑스가 침투시킨 첩자 당원들이 섞이게 된다.
1947년에 월맹은 조직을 확대하여 활동무대를 캄보디아의 북서쪽 지방까지 넓히면서 당시 캄보디아 지식인들 중 답츈, 께오락, 홀봉, 아놉핍 및 침틈 같은 이들을 포섭, 끌어들였다.
그리고 월맹은 캄보디아에서의 활동을 더 강화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일부 땅을 그들의 영토 지역으로 편입하는데 주요한 세 지역은 남동부 지역, 북동부 지역 및 동부지역이었다.
특히 월맹은 북동지역에 들어와 그들의 정치 및 군사 시설을 설치하였는데 그 위치는 스뚱뜨랭 성의 보께오 지역으로 분명한 캄보디아 영토 안이었다.
또 나중에 월맹은 이 지역들을 성(province), 구(district), 군(commune)으로 행정구역을 멋대로 베트남 식으로 나누어 버렸는데 사실은 지금도 캄보디아는 이 방식을 그대로 쓰고 있다. 실지로 변방에서는 월맹이 캄보디아의 땅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맹은 또 캄보디아의 통제를 위하여 친 월맹파이자 베트남계 캄보디아인인 “뉴엔탄손”을 앞 세워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못께아”라고 부르던 이 캄보디아 위원회는 실지로 월맹의 통제하에 있었다.
1954년 제네바에서 있은 제1차 인도지나 전쟁의 평화 협상을 한달 앞두고 있었던 5월초의 “딘빈푸”전투는 모두 월맹군이 주도하였다.
결국 월맹이 모든 것을 지시하고 시행 하였으며 국가와 군대 모두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45-1954년 사이의 초기 캄보디아 공산당원들은 거의가 월맹에 가담하여 교육받은 자들로 볼 수 있다.
(친 월맹 계 크메르 루지에 대한 폴폿의 첫째 숙청 이유)

c. 1954-1970년 사이
제네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나자 캄보디아의 공산 혁명가들은 미국의 지원 하에 결성된 SEATO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여 만든 평화적인 공존을 위한 5대 강령을 지지 받기 위하여 군중을 선동하고 또 독립과 중립을 위한 범 국가적인 운동을 펼쳐 나갔다.
남부 베트남에서는 1954년 바오다이 국왕이 임명한 “뇨진지엠”대통령이 미국 닉슨 부통령의 군사 원조에 힘입어 1957-1958년 사이에 공산주의자 대 검거 및 처형을 가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70%의 남부 베트남 잔류 공산주의자들이 없어져 버려 남부 베트남의 공산당은 사실상 사라져 버리게 되었으며 한 때 다시 재기를 시도하였지만 역시 모두 쉽게 진압되어 버렸다.
그러자 베트남의 공산 혁명은 크게 위축되어 상당기간을 방어적인 자세로 있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이 때 많은 베트남 공산당원들이 캄보디아로 몸을 피하여 중립국 캄보디아는 갑자기 베트남 공산당의 은신처가 되고 또 이들의 기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또 캄보디아를 거쳐 홍콩이나 중국의 광동 지방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한 때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레주안도 1957년 당시 프놈펜으로 피신 하였었다.
당시 프놈펜의 뚤 똠퐁 지역으로 피신하지 않은 남부 베트남의 공산당 간부들은 거의 체포되었었는데 피신자들 중에는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원이자 나중에 호치민시 당 서기장을 맡았던 뉴엔반린(모이끅)도 있었다.

중립국이며 안정되어 있던 캄보디아에서 이들 베트남의 공산당 간부들은 안전하게 피해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붕괴 직전에 다다른 베트남의 공산당 간부들은 1960년 마침내 무력투쟁을 다시 시작하기로 각오하였다.
이들은 캄보디아 국경지역인 스베이링 성의 콤퐁뜨락에서부터 끄라체성의 스놀지방에 이르는 지역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무력투쟁을 시작하였는데 힘에 겨우면 다시 캄보디아 내륙으로 피하였다.
1961년부터 이들은 점점 더 많이 캄보디아 영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1962년과 1963년에는 더 깊숙이 침투를 하여 필요하면 지방 관리에게 뇌물을 주는 부정한 수단을 써서라도 원하는 지역을 확보해 나갔다.
베트콩(-越共-베트남 공산당)들은 캄보디아 땅을 마음대로 활개를 치며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지방의 군대, 경찰, 공무원들을 매수하였고 또 캄보디아 주민들은 이들을 혁명가들로 보고 관대히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1965년에는 용의 꼬리(Naga's tail)로 부르는 캄보디아의 동남부 스베이링 성에서부터 동북쪽 라타나끼리 성에 이르는 동부 지역에 걸쳐 내륙 2-5km 까지 적어도 15만 여명의 베트콩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지상군을 파병하여 참전을 시작하자 1966년에는 그 숫자가 20만을 넘기 시작했고 1967년에도 계속 증가하였다.
당시 월맹은 그들이 승승장구 승리하고 있다고 전 세계에 선전을 하였지만 사실은 거의 캄보디아 땅에 도피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당시 월맹이 캄보디아의 공산 혁명을 도왔다고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남부베트남에서는 뇨진지엠의 강력한 군사적 대처에 발붙일 곳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뇨진지엠의 반공 철모(helmet)전술은 남부 베트남에서 공산당이 거처할 곳도, 공산주의자의 존재조차도 없애버리겠다는 강력한 무력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베트콩의 전술은 분명 잘 못 되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무력투쟁을 선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60년과 1965년 사이에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지만 남부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국민 거의를 통제하고 또 이미 극도의 물질문명과 환락사회로 국민들을 부패 및 타락시켜 버려서 목숨을 걸고 혁명을 따를 국민이 거의 없었으므로 봉기에 실패하고 많은 손실을 보고 말았다.
그러자 남부 베트남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70%-80%가 그들의 적인 “뉴엔 번 티우”가 이끄는 베트남 공화국 군대에 입대하였고 나머지 20-30%는 투쟁을 포기하여 버렸다.
이제 남부 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운동이나 혁명 투쟁을 할 사람은 거의 남지 않고 미국과 티우가 이끄는 정부군에 가담을 하거나 전향해 버린 것이었다.
1961년에서 1963년 사이에 남부 베트남 공화국의 사이공 방어선은 지아딘(Gia Dinh)까지 뻗쳤고 1964년에는 지아딘을 훨씬 넘어서까지, 그리고 1965년-1966년에는 드디어 캄보디아 국경까지 방어선을 넓혔다.
그러자 베트콩은 캄보디아 영내 깊숙이 들어와 그들의 군대 주둔, 병원, 정치국, 수송망, 지휘부 등 중앙당 체제부터 지방 체제까지 모든 주요 체제를 캄보디아 영내에 설치하였던 것인데 한 예로써, 베트남의 “꽝주에(Quang Due)“ 지방 위원회는 캄보디아의 “꼬니엑“에 설치했었다.
1970년에 캄보디아에 주둔하는 베트콩들은 그 수가 150만에서 200만까지 늘어났다.
또 8만여 명의 베트콩 부상병이 캄보디아 내 그들의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기도 하였던 것이다.
캄보디아의 공산당과 또 지방국민들은 베트콩들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
캄보디아는 항상 그들을 받아 주었고 지원하였으며 숨을 곳과 은신처를 제공하고 쌀과 기타 식량도 제공하여 주었다.
사실 이러한 캄보디아의 베트콩에 대한 지원은 거슬러 올라가 1955년 뇨진지엠 베트남 대통령이 공산당 탄압을 시작하고부터 시작되었었으며 1960년부터 월맹이 무력투쟁을 시작하고부터는 더 지원이 많아졌던 것이다.
정말 캄보디아의 공산주의자들과 지방국민들은 베트콩을 친구로써 또 같은 혁명 동지로써
지극히 대해 주었다.
그런데도 캄보디아에 들어온 베트남인들은 아직도 그들의 캄보디아 합병의 야망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항상 “3국간의 단결”, “3국은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기 위하여 떨어질 수 없는 혈맹의 우방이다”, 등이었다.
캄보디아의 공산 혁명가들은 월맹의 슬로건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월맹의 전략은 캄보디아의 공산당을 이간하고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월맹은 캄보디아 공산당원들과 인민들의 우정을 이용하여 그들의 조직에 흡수하려 하였다.
프랑스와 투쟁하는 캄보디아의 공산혁명가들을 월맹이 통제하는 인도지나 공산당에 가입시켰다.
1967년부터 일부 캄보디아의 공산당원들이 월맹의 이러한 행위에 반발을 했지만 월맹의 상대적 지원도 필요했던 캄보디아 공산당 지도부는 이들에게 월맹과 단합하고 협조하라고 지시하였다.
월맹은 이러한 단결을 인도지나 연방의 추구에 목적을 두었고 더 나가서는 캄보디아를 속국화 하려는 야심을 저변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베트콩들이 지극히 어려운 상황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야심을 저버리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해 왔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었다.
월맹은 캄보디아 공산당이 무력 투쟁 과정에서 단결이 되는지 아닌지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래서 위치가 분명치 않은 자들을 발견하면 계속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극비리에 국력을 두 개로 갈라놓는 공작을 계속하였는데 그 방법으로 수시로 캄보디아 공산당의 정책이 잘못되었다, 혁신(좌익)적이다, 진보적이다 등등 간섭을 하면서 반응을 보았다.
월맹에서 교육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당원들은 레닌의 “좌익 혁신은 공산주의의 초기에 이미 사라졌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1968년 캄보디아 공산당이 드디어 무력 투쟁을 시작하려 할 때 이들은 더 강하게 비판을 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캄보디아 공산당을 분열시키고 불만을 퍼뜨리기 위해 캄보디아 공산당 행정부 내부까지 침투, 교란을 하였을 뿐 아니라 태업 행위도 저질러 밀수를 하고 국민들로부터 식량과 가축, 농산물 등을 훔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캄보디아의 주관적인 공산혁명에 사실 타격을 주었다.
1965년부터 캄보디아 공산당과 베트콩간의 갈등은 더 심화되기 시작하였는데 베트콩들은 당시 극히 불리한 전황과 악 조건하에 캄보디아에 피난 와 있으면서도 캄보디아 공산당을 합병하려 했던 것이다.
캄보디아의 북동쪽 국경지대에서 베트콩들은 그래도 폴폿을 위시한 캄보디아 공산당의 지도부 때문에 그들의 흡수 정책을 펼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협조를 얻으려 했으나 캄보디아 공산당 지도부의 지시에 따르는 지역 주민들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지역 당 본부에 찾아와 그들의 막사를 짓는데 허가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약 지역 주민들과 충돌을 한다면 주민들에 의해 공격을 받을 것이었으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캄보디아에서 누리던 경제적, 정치적 이점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또 이 지역의 산세가 험하고 밀림으로 덮여있어서 지역 주민들이 아니면 밀림 속의 미로를 찾을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은폐된 부비트랩을 피할 수도 없었으므로 지역 주민들과 충돌하는 경우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북동쪽 라타나끼리 성의 지역 주민들이라야 고작 3만-4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소수 고산족들이었지만 베트콩들은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평지가 많은 지방에서는 베트콩들은 일부 주민들과 당원들의 포섭에 성공하기도 했다.
주로 뇌물을 주고 인도지나 공산당으로 흡수하였다.
1970년 캄보디아 땅에 주둔하는 베트콩의 수가 150만에서 2백만으로 늘어났는데 북동쪽 산악지대에만 20만에서 30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 중 베트콩 제 5지역(남부)은 남부 베트남의 공산당 본부였는데 당 부서기장인 “보치콩”(나중에 부수상까지 지냄)이 지휘하고 있었고 위치는 북동쪽 캄보디아 땅이었다.
또 남 베트남 공산당 본부는 콤퐁참의 “메못”에 설치하였다.
당시 이 지역의 주요 간부로는 뉴엔티탄, 팜흥, 뉴엔반린, 짠남쭝, 하이소, 하이번, 방번타이 등이 있었으며 군사령관으로 뉴엔치탄이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베트콩들이 캄보디아 땅에 들어와 안착을 했는데 그들의 역할과 상황은 어떤 것이며 또 캄보디아의 입장은 어떠했나?
캄보디아의 땅은 라오스와 같이 베트콩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특히 캄보디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베트콩에게 많은 도움과 지원을 준 나라였다.
라오스는 약간의 은신처 정도로 베트콩들이 이용하였지만 캄보디아에서는,
* 남부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들이 지휘 및 위원회 운영을 하였다.
* 경제적으로 완전히 캄보디아에 의존을 하였는데 필요한 식량과 기타 물품을 구입 하였고 때로 심지어 훔치기도 하였다.
* 북동지역에서 남쪽을 잇는 캄보디아의 도로망은 콤퐁솜 항구를 이용하여 중국, 소련 등 외국에서 지원하는 그들의 군사물자를 수송 가능하게 하였다.

이렇게 베트콩에게 베푼 캄보디아의 도움을 캄보디아 공산당은 외부에 노출하지 않았으나 베트콩들은 오히려 그들이 캄보디아의 혁명을 도왔다고 외국에 선전하였다.
결국 1930-1970년 사이에 어떤 상황하에서든 간에 베트콩은 그들의 인도지나 연방 정책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1930-1945년 사이에는 사실 아무 소득이 없었고 1945-1954년 사이 및 그 이후 1970년 까지 그들이 포섭한 캄보디아 공산당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일부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
1955년부터 캄보디아의 공산혁명은 독립과 함께 유, 무형의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었는데 우선 제네바 평화협정으로 인해 월맹군들이 캄보디아 땅에서 북위 17도선 이북 북 베트남으로 철수해야 했고 그럼으로써 캄보디아의 공산혁명은 주체적으로 캄보디아의 혁명가들에 의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영토 침략
1. “챰파”왕국과 “캄푸치아 크롬”의 흡수

a. 챰파 (Champa)
챰파 왕국은 2세기 경 베트남 중부 지역과 캄보디아의 노코프놈 근처에서 발생한 왕국 이다.
이 민족들은 챰족으로 불렀고 동남 아시아에서 매우 오래되고 또 총명한 민족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베트남에 남아있는 유적지 미손 탑의 비문 기록)
이 챰파 왕국을 베트남(안남)은 다음과 같이 흡수해 갔다.
* 1471년 안남은 챰파의 수도 비자야(Vijaya)를 점령, 이 지명을 빈딘(Binh Dinh)으로
바꿈. 챰족은 서서히 쇠퇴해 가고 안남에 흡수되어 갔다
* 1611년 베트남은 Qui Nhon 남부의 Phu Yen을 점령.
* 1653년 베트남은 Cham의 Kantara를 점령, 이름을 Khanh Hoa로 바꿈.
이 곳은 Nha Trang과 Phan Rang (챰 이름 Panduranga) 근처임.
* 1693년 베트남은 결국 Phan Thiet 지방을 점령함으로써 챰파를 다 흡수해 버렸다.
(캄보디아 땅으로 주로 피난한 이 챰족들은 원래 힌두교를 믿는 민족이었으나 그 지도자들이 말레이시아의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지금은 거의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1975년에 약 50여만 명이었으나 민주 캄푸치아(폴폿 정권) 시절에 70%나 되는 약 35만 명이 학살을 당하였지만 지금은 다시 5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캄보디아에서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호전적 유목민들이 많은 아랍권의 무슬림들과는 많이 달라 매우 평화적이고 온순하며 두뇌가 뛰어나 캄보디아 정계에도 많이 진출하고 있어 부수상, 여러 명의 국회의원, 종교부 차관 등 요직의 인사가 많다) 챰파 왕국을 흡수해 가는 과정에서 베트남은 라오스도 역시 흡수하여 위성국 Yoke국을 세웠으며 다시 남부 캄보디아 (Kampuchea Krom)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b. Kampuchea Krom
Dongnai 강의 서쪽과 메콩강의 남부는 2000년 이상 캄보디아의 영토였다.
이 지역을 프랑스는 1859년 침략하여 “Cochinchine"라고 명명을 하고 식민 통치를 시작했다.
* 1623년 Prey Nokro에 출입 및 교역을 할 수 있는 허락이 캄보디아 왕으로부터 주어졌는데 수십만의 베트남 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고는 이 Prey Nokor를 나중에 Saigon(西貢)으로 이름 지어 버렸다.
처음에는 5년만 교역을 하게 해 달라고 허가를 요청하였는데 5년이 지나도 떠나지를 않았다.
1645년 캄보디아는 Prey Nokor(Saigon)의 반환을 요구하였지만 베트남은 거절했다.
1753년 캄보디아의 왕이 다시 이 도시의 반환을 요구하니 베트남은 그러겠다고 하고서는 오히려 수십만 명의 베트남 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여 버렸다.
그 이후부터 베트남은 캄보디아 땅을 조금씩 흡수해 나갔는데 그 사실은 다음과 같다.
* 1699년 BaRia(Vungtau) 지방을 Phuoc Le(Tui)로 개명. Kampong Sraka Trei를 Bien Hoa로 개명, Prey Nokor를 Saigon으로 개명.
* 1715년 Peam Banteay Meas를 Ha Tien으로, Kramuon Sar를 Rach Gia로.
* 1732년 Peam Me Sar를 My Tho로.
* 1757년 Moat Chruok을 Chau Doc으로.
* 1758년 Preah Trapeang성을 Tra Vinh성으로, Khleang성을 Soc Trang성으로.
이에 반발하여 캄보디아 사람들도 국토회복의 노력을 부단히 하긴 하였는데,
* 1731년 Ba Phnom 성의 주민들이 단결하여 베트남 인들을 쫓아냄.
* 1738년 캄보디아 군대가 Peam Banteay Meas(Ha Tien)의 베트남 인들을 쫓아냄.
* 1743년 Khleang성(Soc Trang)의 주민들이 베트남 인들을 쫓아냄.
* 1748년 월경을 막던 캄보디아 군대와 베트남군간에 Pursat성의 Sap Angkam 지방에서 충돌 발생.
* 1776년 캄보디아 군대와 주민들이 단결하여 Peam Me Sar(My Tho) 및 Long Hor (Vinh Long)의 베트남 인들을 쫓아냄.
* 1835-1847년 사이 Preah Trapeang(Tra Vinh)성의 주민들이 봉기함.
* 1845년 전국적으로 반 베트남 충돌이 발생.
* 1858년 Maot Chrouk(Chau Doc)성의 사람들이 봉기하여 이 지역을 다시 캄보디아로 함.
* 캄보디아 군대가 Khleang(Soc Trang), Preah Trapeang(Tra Vinh) Kramuon Sar (Rach Gia) 등에서 베트남 인들을 몰아냄.

2. 1863-1954년 사이 프랑스의 베트남 영토확장
* 1870-1873년 Raung Damrei(Tay Ninh)성 합병. Peam Banteay Meas(Ha Tien)과 Moat Chrouk(Chau Doc), Prasat Dap(Dong Thap)지방이 포함됨.
* 1890-1914년 Choeung Preah성(Song Be) 합병.
* 1929년 Darlac(Dac Lac)지역을 합병.
* 1939년 Koh Tral(Phu Quoc)섬과 Koh Russei(Hon Doc)섬 및 기타 작은 섬들을 합병.
그리하여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베트남은 약 65,000평방Km의 캄보디아 땅을 그들의 땅으로 흡수하고 주민 100여만 명도 흡수하며 지명까지 바꾸어 버렸다. 현재 베트남 땅에서 살고 있는 이 Kampuchea Krom 인들은 약 4백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3. 1954년에서 1970년 사이 분쟁
1945년에서 1954년 사이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던 캄보디아의 혁명단체들은 사실 독립적이거나 자주적이지 못하고 팽창 전략을 추구하던 베트남 공산당의 통제를 받았었다.
이 당시는 성격상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기간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a. 1954년에서 1960년 사이.
이 기간 동안은 캄보디아에는 사실 명확한 정치 노선을 가진 공산당이 창당되어 있지 않았고 도시나 지방에서 그냥 지하 운동을 하고 있다는 막연한 정도였다.
이 당시는 물론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독립적이거나 자주적이지도 못했고 더구나 자체적 군사단체나 무력단체는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 9월 30일 캄보디아 공산당을 창당하기 위한 첫 번 전국 대표회의 대회를 지금의 프놈펜 역 건물 내에서 가지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당의 정책과 혁명전술 방향을 결정하고 당 강령을 채택하며 당 중앙 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캄보디아 공산당이 조직화된 첫 출발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자 월맹은 자주적인 캄보디아 공산당의 진전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펴기 시작했다.
첫째, 월맹은 별도의 친 월맹 단체를 캄보디아에 비밀리 조직하고 그 지도자로 1954년 제네바 협정 이전에 그들이 훈련시킨 자를 임명하고는 캄보디아 공산당이 아직 전국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치적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둘째, 월맹 자신이 캄보디아 공산당의 정책을 비난하기 시작하고 1960년 결성된 캄보디아 공산당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 캄보디아 사회 계급을 5가지 계급으로 분류하는 데에 반대하면서 캄보디아는 라오스와 비슷한 수준이므로 아직 그러한 분류를 할 단계가 아니라고 했다.
즉 캄보디아 공산당의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 캄보디아 공산당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것을 거부하였다.
* 캄보디아 공산당이 정치 투쟁과 무력 투쟁을 병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월맹은 1960년 모스크바에서 81개 각국 공산당들이 채택한 합의내용을 들고나섰는데 주 내용은 세계 평화를 지키는 것을 그 첫째 임무로 한다는 것이었다.

b. 1961년에서 1970년 사이
1961년 월맹은 계속 캄보디아 공산당의 정치 노선을 비난했으며 심지어 캄보디아 공산당의 정치 노선을 베트남어로 만들어 당간부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투쟁이나 계급투쟁 같은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다.
정치 노선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내용이었다.
1962년에서 1964년 사이에 월맹은 캄보디아 공산당이 모험적이고 혁신적이라면서 더 심하게 캄보디아 공산당을 공격하였는데 그들이 포섭한 자들을 당 내부에 침투시켜 혼란을 조장하였을 뿐 아니라 캄보디아가 무력투쟁을 하는 것을 못 하게 하였다.
1965년 캄보디아 공산당은 처음으로 대표단을 구성, 외국을 방문하는데 대표단은 당시 서기장 사롯사(폴폿)를 대표단으로 하여 육로를 택해 도보로 캄보디아에서 하노이까지 갔다.
월맹의 레주안이 대표로 폴폿을 맞이하였고 회의는 시작되었지만 캄보디아 공산당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성장, 프놈펜의 지도층을 석권하고 캄보디아를 완전 통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월맹은 회의를 끌기만 했다.
월맹의 정치국과 레주안이 여러 차례 수정을 하고 시간을 끌던 쌍방의 회의 합의서에는 결국 베트남어로 기록을 한 것으로 캄보디아 공산당의 계급 투쟁이나 대 미국 투쟁에 관한 내용은 없고 월맹이 공산혁명에 성공하여 베트남 통일을 하면 그 다음에 캄보디아를 해방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캄보디아 공산당은 그 때까지 월맹에 협조만 하다가 월맹이 혁명을 성공하면 캄보디아는 저절로 해방이 된다는 것이었다.
월맹은 캄보디아의 독립, 자주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도 혼자 살수는 없고 서로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도지나 3국이 바로 그러한 좋은 예라고 하였다.
이 회의에서 당시 힘으로 열세였던 폴폿은 별로 반박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조용히 회의를 끝냈지만 레주안은 폴폿이 계속 독자적인 강경 노선을 걸으며 월맹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후 월맹은 동북부 캄보디아에 있는 베트콩 진지를 거점으로 하여 그들이 기 포섭한 친 월맹의 캄보디아 공산당 간부들을 앞 세워 캄보디아 공산당의 분열을 꾀하였다.
1967년 캄보디아의 남서쪽 태국 국경지대의 삼롯 마을에서 무장 봉기가 발생하였는데 처음에 월맹은 매우 당황하다가 시아누크 휘하의 론놀 군대가 이 봉기를 곧 진압해 버리자 안심을 하였다.
1968년 다시 전국적인 봉기가 발생을 하자 월맹은 캄보디아 공산당의 급진적인 면을 다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68년에서 1970년 사이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무장 혁명 봉기에 월맹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캄보디아 땅에서 베트남 공화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피해 은신을 해야 하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1970년까지 월맹은 엄청난 열세의 군사력으로 베트남 공화국이나 미군을 상대로 제대로 전면전이나 전쟁다운 전쟁을 펼칠 수가 없었으며 단지 전쟁을 게릴라전으로 오래 끌어 미국이 반전여론에 밀리고 지쳐 먼저 철군하게 하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그나마 캄보디아 땅을 이용하지 않고는 군수물자의 보급도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은신처가 없어져 괴멸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이 론놀 군과 제대로 협조하여 캄보디아에 베트남만큼의 군사지원을 했었다면 아마 호치민 루트는 끊어졌을 것이고 베트콩은 괴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월맹의 입장에서는 캄보디아 공산당이 무력 투쟁을 벌이는 경우 자칫 론놀의 요청에 의해 미군의 대규모 개입을 초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캄보디아가 조용해야만 미군의 철수를 조기에 달성할 수 있다는 전략을 절대 고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또, 캄보디아 공산당이 강력하게 성장하지 않고 친 월맹적이라야 미군 철수 후에 베트남을 공산 통일을 한 다음, 캄보디아의 합병화에 힘이 들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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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 단편모음 9편 2011-11-12 권태인 1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