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함락보다 13일이 빠른 1975년 4월 17일, 검은 옷에 깡마른 체구의 크메르 루지 군인들이 프놈펜 시내로 진군하자 프놈펜 주민들은 길가에 나가서 착잡한 기분으로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프놈펜 시에 있던 피난민들을 합친 3백여만 명의 사람들은 이 “해방”으로 지난 5년간의 지긋지긋했던 내전이 드디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이 “해방”의 날은 그 동안 지독한 부정, 부패로 극도의 혐오감을 주고 있던 론놀 정권의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 론놀 대통령은 4월 1일에 이미 족히 수백만 달러가 든 가방을 챙겨서 하와이로 달아난 뒤였다. 이 날은 또 그 동안 프놈펜을 포위하여 식량과 모든 보급로를 차단한 후 프놈펜 시내에 계속적으로, 또 무차별로 박격포와 로켓포로 포격을 가했던 붉은 혁명군의 마지막 공격 날이었다. 지난 5년간의 내전 동안 지방으로부터 적어도 2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프놈펜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크메르 루지 해방군들의 잔악한 고문, 기아, 강제노동, 집단 학살 등의 끔찍한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상당수 프놈펜 빈민들은 부패한 론놀 정권에 반감을 갖고 있던 터라 심각하게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프놈펜으로 진주한 붉은 혁명군들과 투항한 일부 론놀군 장교들은 시내를 다니며 “저항하지 마라” “전쟁은 끝났다” 라고 확성기로 외쳐댔다. 도시민들에게 이 해방군들은 이상하게 보였다.
험상궂은 표정에, 너무 검은 피부에 또 검은색의 잠옷 같은 옷을 입고 농부들이 쓰는 끄로마 수건을 머리나 허리에 질끈 묶은 군인들은 굶주림 때문에 모두 수척한 모습들이었다. 이들은 사실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군을 상대로 밀림에서 싸워왔었다. 1970년에 론놀 수상이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프놈펜 정부의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크메르 루지들은 각성의 성도(省都)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골 지방을 점령하였다. 섬찍한 것은 상당수의 군인이 어린이였는데 이 새로운 어린 세대가 바로 크메르 루지의 행동 선봉대였던 것이다. "해방 지역“에서 핍박 받고 가난했던 소작농들은 생전 처음으로 권력과 직책을 얻게 되었고 새로운 체제에 헌신적으로 충성하면서도 또한 그 동안 쌓였던 억압감으로 인해 잔인한 행동대로 변신하였다. 도시는 대혼란 속에 빠져들었으며 식량과 약품을 탈취하는 폭도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습격을 하였다. 모든 화폐는 통용 금지가 되고 무효화가 되었다.. 크메르 루지는 곧 통금을 실시하고 시내의 각 구(區)간을 서로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남자들은 아내와 떼어놓았고 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찾아 길거리를 헤매었다. 4월 18일이 되자 전 도시 주민의 강제 소개가 시작되었다. 군인들은 공포를 쏘며 모든 주민들은 즉시 프놈펜을 떠나라고 하였다. 3백만의 프놈펜 거주민들은 차, 오토바이, 손수레, 자전거 등에 먹을 것과 옷과 돈 등을 싸서는, 또 대개는 보따리와 가방을 이고 지며 대 혼란 속에 도심을 빠져나가는 행렬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론놀 정권 당시의 모든 고위 공직자들과 군 장성들은 모니봉 대로변 공보부 건물에 소환되었다. 그들은 혁명군들과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크메르 루지가 론놀 정권과 평화협상을 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소환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 동안 미국의 지원으로 유지되어 온 론놀 정권 휘하의 이들은 물론 비무장에다 서구식의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이들과 마주하여 검은 옷에 중무장을 한 비슷한 숫자의 크메르 루지군들이 역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게 되었다. 론놀 정권의 외무부 장관인 “롱보렛”과 론놀의 동생이자 “폴폿”과는 바탐방의 시아누크 중학교 동창인 “론논“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미국 대사관은 4월 12일 마지막 철수 때 이들에게 철수를 종용하였으나 이 둘은 폴폿과 잘 아는 사이라 생각하고 남은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협상이나 화해 등의 소문은 불길하게도 거짓 소문이었다. 이들은 가족과 같이 지금의 미국 대사관 자리이자 전에 “인터네셔날 유쓰 클럽”자리였던, 당시의 “써클 스포팁”으로 끌려가서는 아무런 취조나 기록도 없이 사정없이 즉결 처형당하였고 그 시체는 수영장에 처넣어졌다. 시내 전역에서 론놀군 패잔병과 학교 교사들과 의사 및 공무원들은 소환을 당했다. 소환된 론놀군 장교들과 학교 교사들은 그 즉시 손을 뒤로 묶인 채 지금의 “싸츠마이”(신시장)광장으로 끌려가서 즉결 처형당했으며 사병들은 가족들과 같이 가장 힘든 강제 노동소로 보내어져 기아, 혹사, 질병 등으로 결국에는 거의 죽어 버렸다. 더러는 또 “교육”을 위해 끌려갔는데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와 같이 그 뜻은 곧 처형이었다. 4월 17일 오후가 되자 해방군들은 가택 수색을 시작하였으며 만약 론놀 정부 때 입던 공무원복, 군복 등이나 사진이 있으면 집 앞에 내어놓으라고 했다. 론놀 정권 당시 공무원이나 군인으로 있었던 사람들은 신분을 숨기기 바빴으며 옷이나, 책, 사진 등을 태우거나 묻어야 했다. 드디어 주민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도로 변에는 즉결 처형된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하였으며 전투 시에 죽은 정부군들의 시체가 사방에서 썩고 있었다. 즉결 처형당한 시체들 옆에는 폭도들에게 맞아 죽은 그 자녀들의 시체도 처참하게 뭉그러진 채 같이 있었다. 아직 15세도 안된 것 같은 크메르 루지군들은 행렬 중에서도 수시로 사람들을 끌어내어 길 옆에서 총살을 해 버렸다. 자가용차를 몰고 행렬 중에 섞여 가던 사람들은 부르주아지로 간주, 거의 다 처형되었다. 프놈펜이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사이에도 시 외곽에서는 아직 크메르 루지군들과 교전을 계속하고 있는 론놀 정부군들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문교부의 국장으로 있었던 60세의 “체이 찹”은 원래 프놈펜에서 불교대학 교사로 있었는데 내전이 일어나자 정부군에 입대하였으며 프놈펜이 함락되던 날에는 4번 도로 남쪽의 “콤퐁스푸”지역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장교로 있었다. 그는 휘하 장병 2천여 명과 프놈펜 함락 후에도 4일간을 더 크메르 루지와 교전을 계속하여 콤퐁솜 항구로 가는 남진을 막았었다. 교전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크메르 루지는 계속 확성기로 선전 공세를 폈는데 전쟁은 이미 끝났고 미국은 론놀 정권을 버렸으며 지금 항복을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체이 찹”의 부대장은 항복하기로 결정을 하였고 4월 21일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매일 C 레이션 식량 박스를 그들의 주둔 위치에 떨어트리고 가던 미군 수송기는 그날 이들의 항복을 비행기에서 보았으며 마지막 식량을 투하하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항복한 2천여 명의 론놀 정부군들은 줄을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두 손을 뒤로 돌려서 “끄라마”(수건)로 손을 묶이었다. 크메르 루지 지휘관은 “혁명 조직을 지원하시는 시아누크 왕자가 사면을 해 줄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들이 말하는 사면 장소라는 숲 속으로 행진을 시켰다. 숲 속에 도착을 하자 크메르 루지군들은 포로들의 묶었던 손을 풀어 주고는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일단의 크메르 루지군들이 도착을 하였고 포로들은 다시 소대별로 나누어 줄을 서라고 했다. 이번에는 100명씩을 굵은 밧줄로 단단하게 손을 묶었다. 포로들은 모두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100명씩 묶인 여러 단체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으로 한참 들어간 뒤 정지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크메르 루지군들은 일제 사격을 가했다. “체이 찹”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는 열의 중간쯤에 서 있었는데 사격이 시작되자 얼른 쓰러졌고 그 위에 그의 기갑 부대원들이 총을 맞고 계속 쓰러졌다. 동료들의 비명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크메르 루지군들이 “혁명 만세! 제국 주의자들을 없앴다! 론놀 체제를 물리쳤다!” 등등의 환호를 질러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참 후 숲 속에는 다시 적막이 돌아왔고 새 지저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체이 찹”은 몸을 일으켰다. “체이 찹”은 등에 총을 맞은 다른 생존자를 찾아냈다. “체이 찹” 자신은 손과 다리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것뿐이었다. 둘은 무조건 뛰었다. 10일간을 먹지도 못하고 숲 속을 헤맸다. 그러나 3일 째에 등에 총을 맞은 전우는 출혈이 심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체이 찹”은 4번 도로까지 나와 길 가 시체에서 벗긴 농부 옷을 입고 신분을 숨기고는 철수민 행렬에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친척들이 있는 바탐방 시로 가려 하였지만 크메르 루지는 허락을 하지 않았고 결국 “체이 찹”은 바탐방 성의 “몽 루세이” 마을에서 4년간을 위장 신분으로 강제 노동을 하며 지내야 했다. 1978년 폴폿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대표단들에게 자신은 전례 없는 독창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모택동과 4인방의 문화 혁명의 정책과 흡사한 것이었다. 프놈펜 시의 주민을 지방으로 완전 철수시킨다는 정책은 프놈펜 함락 수개월 전에 발상이 되었었다. 크메르 루지 생각에는 프놈펜 시에는 3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또 그냥 뿔뿔이 시골로 흩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더 강력하게 도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메르 루지들은 부자, 게으른 사람들,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층 등의 도시민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제국주의자”들과 같이 살다가 해방 이후에야 마지못해 혁명에 가담을 한 프놈펜 시민들은 “새 인민” 또는 “4월 17일 인민”으로 불렸으며 그들의 앞날에는 어두운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상당한 후일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던 “혁명 조직”의 정치국인 “앙카”는 전국에 걸쳐 쌀 생산량을 할당하였다. 캄보디아는 진보적인 국가 산업 계획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쌀 수출을 그 재원으로 보고 과잉 쌀 생산을 하여야 했다. 모든 지방이 가능한 생산량보다도 많은 쌀 생산 할당을 받았지만 프놈펜 주민들이 거의 정착한 바탐방 성은 특히 달랐다. 한때 캄보디아의 곡창 지대였던 이 북서쪽 지방은 전쟁 때문에 불모지대가 되어 버렸는데 “4월 17일 인민”들이 이 농토를 다시 개간해야 했다. 중노동의 농사 경험이 전혀 없는 프놈펜 주민들은 년 중 가장 더운 4월의 뙤약볕 아래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바탐방으로 가야 했다. 행군 도중에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수없이 쓰러졌다. 바탐방에 가서도 이들은 그들이 생산한 쌀은 먹을 수가 없었고 풀 같은 죽만 마시고 살아야 했으며 가끔 구할 수 있는 푸성귀나 잡은 벌레들이 유일한 반찬이었다.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연일 수백 명씩 속출하였다. 크메르 루지들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살아 있다고 해서 국가에 득이 되는 것이 없으며 너희들이 죽는다고 해서 국가가 잃을 것도 없다”고 했다. 프놈펜의 “툴 톰퐁”에 살고 있는 정년 퇴직한 내과 의사 출신인 “칩 랭 스랭”씨(69세)는 32년 전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검은 옷을 입은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지요. 우리들은 집 앞에 흰색 깃발을 만들어 걸었어요. 아침에 수십 명의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자동차 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소위 호지명 산달을 신고 있었고 말투들이 매우 거칠었어요. 그들은 확성기로 주민들은 침착하게 집안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론놀 정부와 같이 일하기로 협상을 했다고 했어요. 우리들은 그 소리를 믿고 모두 기뻐했지요.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자 24시간 통금령이 내려졌고 우리들은 집안에서 꼼짝을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병원에 남아 있었던 나의 동료들은 집에 갈 수가 없게 되었지요. 다행히 그 때 나는 집에 있었으므로 가족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요. 크메르 루지들은 미군이 프놈펜을 폭격할 것이니 모두 프놈펜을 떠나라고 했지요. 그들은 사흘 정도만 가면 된다고 했고 공산당 정치국인 “앙카”가 부모나 같으니 돌봐 줄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집에 약간의 옷은 남겨두고 먹을 것을 싸서 집을 나섰지만 온 시내에 철수민들이 차서 움직일 수가 없었지요. 사흘이나 지난 4월 20일에서야 우리는 겨우 프놈펜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나는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휘발유를 구할 수 없어 오토바이를 밀면서 “깐달”에 있는 친척집으로 겨우 갈 수 있었습니다“. 5개월이 지나자 그는 가족들과 같이 바탐방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바탐방에서 그는 집을 짓는 일과 야채를 기르는 일을 맡았으며 아내와 아이는 논에 가서 일을 해야 했다. 얼마 뒤에 그는 아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내는 병원은 고사하고 심지어 간단한 해열제의 투약도 금지되었고 계속 논에 나가서 일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어느 날 아내는 논에서 실신을 하였고 곧 숨을 거두었다. 그의 두 아들도 얼마 안 가서 심한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크메르 루지는 도시민들이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길 바랬던 것이다. 3백만 주민 소개가 끝난 프놈펜 시에는 몇 안 되는 동맹 국가들과 외교 업무를 담당한 행정 요원들을 위주로 한 크메르 루지의 간부급 2만 여명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또 시내 전역의 빈집들을 뒤져서 귀중품을 찾아내는 일들과 론놀 정권의 모든 잔재를 없애버리는 임무도 맡았다. “모니봉”가와 96번 가의 모퉁이에 있던 오래된 성당은 그 흔적 하나 남기지 않게 마지막 벽돌 한 장까지 철거하였다. 또 화폐를 없애버리는 정책에 따라 “노로돔”가와 41번 가 사이 모퉁이에 있던 국립은행을 폭파하였다. 시 외곽에서는 백만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프놈펜 시내 거리에는 폐지가 되어 버린 돈 다발들이 바람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단 하나의 옛날 상징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1975년 말에 북경에서 돌아 온 시아누크 왕자였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귀국을 하자 말자 왕궁 뒤편에 있는 조그만 빌라 안에 자택 연금을 당하고 말았으며 가끔 생명의 위협을 느껴 가면서도 일단은 그 안에서 편히 다음 3년을 지낼 수 있었다. 1977년이 되자 폴폿의 “민주 캄푸치아”와 옛 공산주의 동맹국인 공산 베트남간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분쟁의 발단은 국경 문제였으며 결국 1979년 1월에 베트남군은 프놈펜을 점령하고 10년간의 군사 주둔 및 정치 간섭을 하게 된다. 론놀의 호위병을 지냈던 헌병 장교 “메스 칭”의 아내 “끄리”(56세)는 지금 프놈펜의 “멘체이”에서 노상 식당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1975년 4월 17일 남편의 말에 따라 모든 군복과 사진, 책 등을 집 앞 바나나 나무 밑에 묻어 버리고는 18일에 집을 떠나 시외의 부모님 집으로 갔었다. 친정에서 21일까지 있다가는 크메르 루지군에 의하여 끌려 나왔으며 그날이 결국 부모님들과는 영원한 이별의 날이 되고 말았다. “끄리”는 3개월이나 걸어서 바탐방의 집단 농장으로 끌려갔는데 신분을 속였기 때문에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1977년 4월에 그녀는 집단 농장에서의 노동의무 기간이 끝나게 되어 남편과 5살 난 아들이 남아 있었던 마을에 찾아 갈 기회가 생겼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이웃들의 얘기는 크메르 루지 군인들이 와서 남편을 “교육”시키러 데려 갔다고 했어요. 교육이란 거 결국 죽이는 거지요 뭐. 5살 난 아들이 울면서 아버지를 붙잡고 매달렸었대요. 그러나 크메르 루지 대장이 아이를 움켜쥐고 가로수 나무뿌리에 내동댕이쳤답니다. 정말 부처님께서 돌봐 주셔서 아이는 죽지 않았어요."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웃들의 말로는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그녀는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었다고 한다. 남편 이외에도 그녀의 부모들과 형제자매 6명이 모두 크메르 루지에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도마질을 하고 있는 그녀 옆에는 유일한 혈육인 그 때 살아난 아들이 TV를 보고 있었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해방?”한 뒤에 그녀가 프놈펜에 다시 와 보니 길은 텅 비어 있었고 노략질을 한 뒤의 쓰레기들만 뒹굴고 있었다. 문과 창문들은 모두 뜯어지고 부서져 길바닥에 던져져 있었으며 그녀의 옛날 집은 다 허물어져 버리고 잡초만 무성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녀는 근처의 빈 아파트를 하나 차지하여 어린 아들과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프놈펜 귀향민들의 얘기는 모두 비슷한데”칩 랭 스랭“도 아내가 죽은 후 프놈펜이 해방되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프놈펜 시내에 들어서니 온 길거리는 부서진 전축 판이나 쓰레기 같은 것으로 가득 찼고 어떤 구역은 베트남 군인들이 지키면서 출입을 할 수 없는 동네도 있었습니다. 아주 가끔 길에서 사람을 볼 수 있었지요. 프놈펜은 유령 도시처럼 조용했어요. 길은 있어도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집들은 많았어도 사는 사람이 없었지요. 내가 살던 옛 집은 다 부서져 버렸어요. 그래서 다른 빈집을 하나 골라서 살기 시작했지요." 지금은 치솟아버린 부동산이지만 당시 프놈펜은 아무나 집과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칼멧 병원에서 다시 내과 의사로 근무를 시작했지만 많은 동료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수라장을 이루며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는 프놈펜 주민들)
부록: <비밀 외교문서 발췌> 캄보디아 주재 대사관. 교민 비상철수보고서
“철수 후 한국 대사관은 공산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기자의 목격 제보 ▲1975.4.17 프놈펜 함락 ▲75.1.29 한승 건설회사 소속 선박 한승 제2호 및 7호가 유류 1천200톤 과 1천400톤을 적재하고 월남 국경을 넘어 메콩강상으로 프놈펜으로 항해하다 1.29 16:00 캄보디아 Neak Luong 남방 13마일 지점에서 공산군의 포격으로 2호는 침몰, 7호는 불타는 가운데 미국 예인선의 예인으로 1.30 Neak Luong에 도착. 선원 인명피해는 없음 ▲주 크메르 대사대리→장관, 75.1.31, 대사관은 안전강화를 위해 24시간 보초, 야간 순시 등 시행. 또 유선. 무선 연락망에 의한 정시.수시연락 긴밀히 취하고 있음. 상황이 더욱 악화됐을 때는 대사관 인원을 최소한으로 감소하고 잔여 인원을 인접국으로 임시 출장 보내는 등 위험분산을 시도할 예정.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님 ▲주 크메르 대리대사→장관, 당관은 1.24 프놈펜 주재 전 한국교포에 대해 안전지대로의 대피를 권고하는 공고. 1.29 11:00 크메르 국경선을 지나 북상하던 콘보이(유조선 4척, 상선 3척, 바지선 4척)는 메콩강 연안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공산군의 포격으로 유조선 1척 침몰, 2척 좌초, 상선 2척 좌초 등 심한 피해를 입음 ▲당시 크메르 정세..크메르 공산군 신년 대 공세 이후 프놈펜 수송의 80%를 담당하고 있던 메콩강 봉쇄. 미 대사관 직원 2.11-15일 방콕 철수 계획. 당관 직원 가족 및 중정 요원 가족 방콕 철수 계획(미 대사관 비행기편, 13명), 잔류인원(대사관직원 9명.교민 등 총 68명) ▲75.2.18 아주국장→기관실장, 철수 경비요청. 크메르 공산군은 `프놈펜' 메콩강 동안 2마일을 점령, 프놈펜시 무차별포격, 주 프놈펜 아국 대사관 및 관저 항상 낙탄의 위험 하에 노출 ▲주 크메르 대리대사→장관, 김세원(2.9 퇴원, 프놈펜 귀임한바 있음/담낭 제거수술) 대사는 지난 3일간 고열로 병세 악화될 징조, 2.18 미 대사관 비행기편으로 급거 사이공 한월 병원으로 향발 ▲대사대리→장관, 미 대사관 비상계획 철수 계획에 포함돼 있는 대사관 요원은 대사, 참사관, 무관, 1등 서기관(중정), 통신사, 한인고용원, 태권도 교관 2명(중정) 모두 8명, 미국계 군 관계회사 한인 고용원 41명 등 49명. (공항 폐쇄에 대비한)비상철수 준비는 지정된 방송국에 의한 지정된 음악.신호 방송으로 시작, 일정 시간 경과 후 지정된 장소에 집결, 미측이 제공하는 헬기에 탑승. 1인당 소지품은 30킬로 미만. 49명 이외에 선원, 요식업자, 선박회사 지사원, 태권도사범, 고아원 경영자, 크메르인과 연고자가 있는 여인, 기타 무직자 등 25명의 한국인은 비상철수계획에 포함시킬 수 없게 돼있음. 이들에 대해 대사관은 교통수단이 있는 동안 퇴거할 것을 권고, 명령하는 공고를 여러 차례 내고 각종 방법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으나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음 ▲안전대피 권고문(75.1.24, 75.2.13일) ▲75.2.26 크메르 주재 한국대사관, 공고 "당 지의 정세 감안, 각자 안전도모 위해 프놈펜 체재 한국인으로서 신빙성 있는 비상철수 계획이 없는 자는 전원 10일 이내에 당지에서 퇴거 할 것". 26일 현재 퇴거인원은 17명, 비상철수 계획이 없는 교포는 24명 ▲2.27 세번째 공고..10일내 퇴거명령 ▲3.3 오후 5시, 주 크메르 대사 유숙 호텔 정문 앞 5미터 지점 노상에 122밀리 로켓탄 낙하, 대사 운전수 부상, 수술. 또 사망자 5명, 부상자 10명 발생 ▲김세원 대사 사이공 한월 의료원에 입원, 3.6 수술 후(치질) 경과에 따라 귀임예정 ▲3.6일자 공관보고, 공관문서처리 소각(본부 보관서류 및 기타 행정서류), 후송(방콕 또는 서울, 장기 보관용 서류, 1주내 후송), 휴대(경리. 비밀관계 서류.암호자재. 교민현황(2.27일 이후 추가철수, 2명/ 잔류인원 71명..미 항공기편 철수 49명, 기타 22명) ▲(3.10일자 대사 보고)크메르 재야세력은 `시아누크'와의 협상을 위해 `부 야네아트'공(시아누크의 외삼촌)을 대통령으로, `손산'을 내각수반으로 옹립하려 하고 있음. `론놀' 대통령은 선 협상, 후 퇴진을 주장하고 있으나 미 의회의 대 크메르 추가원조 제공 조건으로 론놀의 퇴진을 요구할 때 론놀 대통령의 일시 국회 출국은 불가피할 것임 ▲3.17 장관, 미국대사관 철수이전이라도 아국공관을 일부 내지 전면 철수할 수 있는 재량을 부여하는 내용의 전문을 주 크메르 대사에게 발송 ▲4.1, 5일 철수한다고 밝힌 일본을 제외하면 잔류공관은 한. 미. 월. 대만뿐이라는 내용을 본부에 보고 ▲프놈펜 잔류 교포는 42명(미국계 회사 근무..) 공관직원 5명(대사, 정경훈 1등서기관, 박재욱 1등서기관, 김봉식 무관, 이무상 통신사) ▲비상철수 1진(무관. 정경훈 서기관. 파견관, 4.4 미국대사관 연락기 편으로 방콕 철수 명), 2진은 (공관장과 통신사 등 2명) ▲4.1 론놀 크메르 대통령 망명, 잔류 인원 5명중 3명은 4일 방콕으로 대피. 대사와 통신사는 4.8 철수 예정, 잔류 교포 퇴거도 만전 기하였음 ▲대사. 통신사 등 나머지 2명도 4.5 태국으로 무사 퇴거 ▲4.5 이후 프놈펜 잔류 외국공관은 미 대사관뿐. 4.5 아국공관 철수 시 일본. 자유중국 대사관도 함께 철수 ▲ITT(미국인회사) 직원 3명과 ABC 기자 이요섭, 4.11 프놈펜에서 마지막 철수 ▲프놈펜에 잔류했던 교포 김대국(항공기술책임자)는 프랑스 대사관의 보호를 받다가 태국으로 호송되는 외국 난민 600여명 중 제1진(250명)으로 5.3 11:30 태국 국경에 도착, 5.6 당관에 보고한 바..(태국대사→장관).. 아국 대사관은 공산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다는 얘기를 일본 기자로부터 들음 ▲장관→태국대사, 그간 크메르 주재 아국인이 프놈펜 함락 이전에 전원 무사히 철수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금번 김대국이 호송됨으로써 동 사실이 유포될 경우 대외적으로 아직 아국인이 크메르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길 염려. 상기를 감안, 사실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바람. ▲(1975.4 월남, 크메르 패망)... (끝)
부록: 크메르 루지의 프놈펜 해방 일지 및 명령서 내용
1975년 4월 1일은 크메르와 크메르 간 싸움을 시키던 미국 닉슨 대통령의 독트린이 망하고 크메르 민족이 대 통일을 시작하는 날로 승리의 나팔을 부는 날이다. 또 4월 12일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마침내 캄보디아에서 내 쫓기던 승리의 날이다. 그리고 4월 15, 16, 17일은 시아누크가 이끄는 망명연합전선(기실은 크메르 루지라 불리는 캄푸치아 공산당이 주축)군이 론놀이 이끄는 크메르 공화국을 상대로 프놈펜 대 공세를 폈던 작전기간으로 독립을 쟁취한 날이며 동시에 크메르 새해의 날이다. 그러므로 4월 15일은 캄보디아 공산당 혁명 영웅들의 영혼을 기리는 날로 (공교롭게도 1998년 폴폿이 이날에 죽었다) 이날은 반기를 게양하고 라디오 방송으로 애도문을 낭독하여 우리 동지들이 어떻게 희생하였는지 세계에 알리며 애도문은 매 시간 반복하고 국가도 매시간 연주되어야 하며 군가를 계속 방송한다. 4월 16일은 승리를 환영하고 전장에 나간 남녀 동지들의 용맹을 칭송한다. 1975년 4월 17일은 크메르 공화국이 패망하고 시아누크가 이끄는 망명연합전선이 캄보디아의 혁명을 승리로 장식한 날이다. 혁명단체(나중에 민주 캄푸치아)의 지도부는 크메르 신년을 미 제국 주의자 들을 몰아내고 위대한 전진을 위한 혁명조직의 정책을 시작하는 승리의 날로 바꾸면서 신년의 풍습이나 가족들이 만나는 풍습을 모두 없애 버렸다.
1. 군사적 움직임 1975년 4월 17일 0100: 크메르 공화국의 3사단 소속 미제A2찝차 2대가 백기를 달고 프놈펜 외곽을 다니면서 “전군은 모두 무기를 놓고 백기를 달고 상대방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평화의 표시로 백기를 달기 바란다”고 방송하고 다녔다. 0130: 평화를 수락하는 표시로 론놀군의 한 장군의 지시로 105mm 포를 발사했다. 0245: 프놈펜의 전방 방위선은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었고 론놀군들은 각 소속부대에 무기를 반납하기 시작했다. 0600: 탈출하는 론놀 정권 고위층들이 탄 많은 헬기들이 프놈펜 상공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날아갔다.
2. 프놈펜에서의 움직임. 0615: 먼동이 밝으면서 크메르 루지 군인들이 프놈펜 시내로 진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무기와 장비는 거의가 중국제였다. 복장은 검은색 옷에 중공군 모자를 썼고 고무로 만든 샌들을 신었다. 모두 왓 프놈 쪽을 향해 사방에서 진군해 들어왔다.
3. 크메르 루지의 프놈펜 집결목표지 동부 쪽에서 진군한 군인들은 2번 국도를 따라왔다. 북쪽에서 진군한 군인들은 쯔로이 짱바 다리를 건너왔다. 북서쪽에서 진군한 군인들은 5번 도로를 따라왔으며, 서쪽에서 진군한 군인들도 5번 도로를 이용하였고, 남서쪽에서 진군한 군인들은 3번도로를 이용하였다. 특별지역에서 진입한 군인들은 2번 도로를 따랐는데 모두6개의 방향에서 진입하여 왓 프놈에 집결하였다. 3.1. 주민 소개의 목표지 크메르 루지의 “조직”(앙카)는 소개할 주민들을 중앙시장(싸츠메이)에 집합, 각 소개 지방으로 보냈다. 1). 프놈펜의 동쪽 및 남쪽 지역의 주민들은 동부 지방인 쁘레이벵 성과 스베이링 성으로 이동되었다. 2). 프놈펜의 동쪽 및 북쪽 지역의 주민들은 북쪽 지방인 콤퐁참, 콤퐁톰 및 시엠립 성으로 이동되었다. 3). 프놈펜의 북서쪽 지역 주민들은 북서쪽 지방인 콤퐁치낭, 푸삿, 바탐방 성 등지로 이동되었다. 4). 프놈펜 남서쪽 지역의 주민들은 2번도로를 따라 타께오 및 캄폿 성과 서쪽인 콤퐁치낭 및 콤퐁스푸 지방으로 이동되었다.
4. 프놈펜 주민들의 동향 4월17일 0615: 프놈펜의 주민들은 대체로 5개의 군으로 나누어졌는데, 1). 정부의 공무원으로 있던 사람들은 매우 공포에 질려있었고 주로 집안에 있으면서 양측의 평화 협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2). 론놀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자들은 길가에 나와 크메르 루지 군의 입성을 환영하며 시내가 떠들썩하도록 부라보를 외쳐댔다. 3). 가족의 일부가 직장에 나갔거나 병원에 입원을 했거나 한 사람들은 가족들을 찾기 위해 길거리를 돌아다녔으며 무기를 들고 있던 자들은 크메르 루지에게 사살되기도 했다. 4). 전에부터 크메르 루지의 혁명에 가담했던 자들은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들과 비밀 연락을 취했던 크메르 루지들을 찾아 다녔고 또 크메르 루지들에게 길을 가리켜 주거나 론놀정부의 공무원들 집을 가리켜 주고 다녔다. 5. 0630, 크메르루지군들은 프놈펜 방어선을 통과하여 진군한 뒤에 역 앞 잔디공원을 경계로 시를 2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5.1. 0645, 크메르 루지 남서지구 부대는 프놈펜 방송국을 접수하고 다음과 같이 방송을 시작했다. 1).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전국에 걸쳐 100% 승리를 했다. 2). 우리 당은 초당적인 개념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평화를 찾을 것이다. 3). 우리 당은 과거 정권의 고위직 어른들과 친 론놀정권 인사들, 행정관리들, 학계인사들을 국무성에 초청하여 전국에 걸쳐 평화적인 방법으로 평화 협상을 하고자 한다. 5.2. 0715, 크메르루지의 서쪽 지구 부대는 프놈펜 방송을 다시 재개하면서, 1). 우리당은 론놀이 이끌던 반역도당 크메르 공화국에 대해 100% 승리를 쟁취했다. 2). 우리는 무력으로 이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3). 우리당은 그 누구와도 협상을 할 필요가 없다. 4). 반역자들은 처단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5.3. 0730, 크메르 루지들은 3륜차를 타고 시내를 다니며 확성기를 이용하여 방송을 하고 다녔다. 1). 사람들은 동요하지 말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 2). 각자 자기 집으로 모두 귀가하고 대기하라. 3). 3일 이내에 시내를 모두 떠날 준비를 하라. 4). 이동지역은 시에서 3km쯤 되는 지역이다. 5). 당이 지시하는 방향으로만 이동하여야 한다. 6). 많은 물품을 휴대하지 말라. 7). 시내를 떠날 때까지 3일의 여유가 있다. 8). 당이 지시한 방향 이외는 가서는 안 된다.
6. 전 시민이 시내를 떠나야 하는 이유 1). 혁명조직(앙카)는 시내에서 적을 색출 소탕할 것이다. 2). 당이 이미 정한 방침을 이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3). 앙카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이 있다. 4). 미국과 그 앞잡이들이 프놈펜을 큰 폭격기를 동원하여 폭격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앙카는 접수하였다. 6.1. 0745: 크메르 루지 군인들이 골목길을 다니면서 도시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였고 반항하면 즉시 사살하였다. 6.2. 크메르 루지들은 도시의 외곽 출구에서 소개민들을 검문하기 시작하였다. 6개의 각 지역부대들은 각기 3개의 검문소를 시 외곽 도로에 설치하고 론놀 정권의 고위관리, 론놀군의 군인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과거 론놀군의 첩보부대원들과 과거 크메르 루지를 배반하고 도망했던 자들을 중점 색출하였다. 하루 평균 100-300명을 색출해 내었다. 명령서 제1부 프놈펜을 4개의 구역으로 분할한다. 1. 메콩강의 동쪽지역 a) 메콩강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1번 도로를 따라 스베이링 성과 쁘레이벵 성으로 소개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앙카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강의 서안에 있는 쁘렉 넥릉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일부는 고향인 타께오와 캄폿 쪽을 향해 2번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고향에 도착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크메르 루지는 4월 17일 소개 시작 일로부터 15일이 되는 5월 1일에 모든 사람들의 이동을 중지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날로부터 그 누구든, 당시의 위치에서 정착 또는 인근 집단 농장으로 가야 했다. b) 똔레바삭(차토묵 강) 강의 북쪽에 살던 사람들은 쁘레이벵과 캄퐁참으로 이동되었으며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일부는 소개 목적지까지 도착을 하지 못했는데 중간에 다시 집으로 가려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며 결국 그들은 5월1일 위치에 정착해야 했다. 그리고 프놈펜 북부의 주민들은 쁘레이벵성, 스베이링성, 콤퐁참성 등의 아무 곳이나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했고 시골에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형제, 어른들 여러분 더 이상 먼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당분간 이 곳에서 정착을 하면 나중에 당에서 차량 등 모든 것을 지원해 줄 것입니다” 라고 속였다. 2. 프놈펜의 북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a) 철길에서부터 메콩 강변까지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5번 국도를 따라가다 강을 건너고 또 6번 도로를 따라 콤퐁톰과 시엠립 쪽으로 가게 했다. b) 철길에서부터 동쪽으로 툴꼭 지역에 살던 사람은 5번 도로를 따라 푸삿과 바탐방 쪽으로 가게 했다. 3. 프놈펜의 서쪽 지역에 살던 주민들도 2개 그룹으로 나누어, a) 찰스드골 도로에서 툴꼭지구까지에 살던 사람들은 콤퐁치낭으로 가게하고 또 콤퐁스푸의 오동 지역으로 가게 했다. b) 프놈펜의 남서지역인 찰스드골 도로에서 3.18 학교까지에 살던 사람들은 서쪽으로 소개, 4번 도로를 따라 콤퐁스푸로 보냈다. 4. 시의 남쪽 사람들은, a) 3.18학교에서 벙 뜨라벡 사이 거주민들은 캄폿 지역으로 보냈다. b) 모니봉가에서 강가까지 사이에 살던 주민들은 2번도로를 따라 타께오 성으로 보냈다. 주민들을 모두 소개시키는 이유는, 1) 중국 공산당 의 이론대로 혁명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내부의 적을 완전 소탕하라는 앙카의 지시에 따라. 2) 모든 적성 인민들이 100% 당의지시에 순종할 수 있게 완전 분해를 하여 분산시킨다. 3) 당원이 될 수 있는 자와 또 없애버려야 할 반동들을 구분 해 내는데 있다. 즉 있어도 득이 없고 없다고 손해가 아닌 자들을 색출, 없애는데 있다. 4) 믿을 수 없는 자들, 소위 과거 정부에 일을 했던 자들과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을 색출, 처단하는데 있다. 즉, 배를 젓는 동안 파도를 일으키지 말고 고기를 잡는 동안 흙탕을 일구지 말라는 원칙에 따른다. 5) 모든 인민들이 자기의 모든 재산을 완전 포기할 수 있게 만들려면 멀리 맨몸으로 떠나게 해야 한다. 아니면 나중에 문제가 커진다. 6) 이미 당은 모든 사유재산을 무효화, 국유 재산으로 하고 없애 버렸다. 7) 이미 기존 당원들과 인민들에게 약속한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벽돌집, 자동차, 다이아몬드, 빌라 등은 농부와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낸 자본주의자들과 봉건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동지들과 인민들을 위한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 이들을 철저히 추적해서 모두 압수해야 한다. 8) 진정한 혁명이란 시골에서 출발하여 시골을 도시화 해 나가는 것이다. 9) 나라를 가난에서 부유하게 만들기 위하여 일단 자본주의자들과 봉건주의자들의 모든 것을 압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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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단편모음 3편
2011-11-05
권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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