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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龍仁古戰場
이름   姜孟勳 등록일   2004-12-31 오후 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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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龍仁古戰場>

요즘 이순신 드라마가 테레비에서 한참 방영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근처에도 임진왜란과 관련한 역사의 현장이 있는데 원래 人心이라는 것이 늘 그런 것이지만 일단 적과 싸워 패배한 곳은 기념탑은 커녕 위령비 하나도 보이지 않는 쓸쓸한 곳으로 쇠락하여 기어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마는 법이다.이 龍仁의 古戰場들도 이런 점에서 결코 예외는 아니라 생각된다.

사실 알고 보면 패배란 대략 국가나 국가가 임명한 장수들의 과오에서 잉태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런 허무한 전투에 동원되어 어이없게 순국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행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이 글은 읽고 나서부터는 이 근처를 지나다닐 때 당시 그 현장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서 고전분투하였던 옛 義人들의 고난을 한번 정도 생각해주기 바란다.

1.용인전투개요

1592년 6월3일, 왜군에 쫒겨 한성을 버린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하여 임진강 방어선을 강화시킬 때 이를 지원코저 조정의 명에 의하여 下三道에서 근왕병 5만을 모집한 당시 전라관찰사겸 순찰사인 李洸과 전라 방어사 곽영等이 水原에 이르니 이곳을 지키던 소수(4~5백명)의 왜병이 용인쪽으로 달아났는데--아마 용인에는 후방 보급로를 지키는 왜군 수비대가 이미 진을 치고 있었는듯--광주 목사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좇아 지금 현재 용인군청이 있는 곳에 조선군 진지를 전개하였다.

6월4일, 북두문산에 진을 치고있던 왜군을 경안천을 넘어 곽영이 공격을 개시하니 이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용인군 북단의 문수산(해발 222미터,지금 국도 43번과 지방도 57번이 만나는 곳으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으며 지금 삼성 에버랜드 뒷산의 북쪽 능선 끝부분에 있다)으로 달아나 버렸다.

6월5일 백광언, 이지시 휘하의 2천이 이들을 추격,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목책을 치고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저항하는 적을 쉽게 격파하지 못하고 지쳐서 쉬고 있을 때 한성에서 급히 출동한 脇板安治(와끼자까 야스하루)휘하의 왜군에게 별안간 옆구리를 찔리는 바람에 그냥 전열이 무너져버린다.
조직이 와해된 병사들은 산산 흩어져 光敎山(해발 522미터,수원과 용인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분당의 서쪽 즉 경부 고속도로 건너 편에 있다 )동남향 계곡 新鳳洞(요즘 난개발로 유명한 용인 수지지역 풍덕천동 안쪽 계곡))에 있었던 李洸의 本陣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튿날 6월6일 새벽 6시경, 이곳에 아침 식사를 하러 모여드는 조선군을 脇板安治 휘하의 기병 1,600이 또 다시 급습 유린하니 놀랜 마음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체 4~5만의 군사가 그야말로 추풍낙옆과 같이 와르르 무너져 뿔뿔히 낙향하고 마는 阿鼻叫喚 대참패를 기록하게 된다.

이 용인전투 이후, 왜장 脇板安治는 당연히 豊臣秀吉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고 이 당시 육지와는 달리 해전에서 공세를 취하며 연전연승하고 있던 우리의 이순신장군을 격파하기 위한 대표선수로 발탁되는데 그는 이 때의 승리감에 도취해 기고만장해 있었던 탓인지 한산도해전에서 7월8일 곧장 완패하여 바다에 빠지고 마는 수모를 당한다.
이후 다시 명량해전에도 참가를 하였으나 이순신장군에게 또 다시 패배하여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용인전투에서 무사히 탈출한 광주목사 권율은 이 전투에서의 교훈을 바탕으로 바로 한달 뒤 대둔산 梨峙(배티고개)전투에서 小早川군을 무찌르고 이어서 독성산성(禿城山城) --지금의 오산 부근-에서의 승리 그리고 행주대첩으로 이어지는 눈부시는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知彼知己이면 百戰不殆라는 말이 매우 유효함을 알 수 있다

**나의 판단으로는 明軍의 조기 참전에도 불구하고 빨리 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7년이나 끌게된 것은 왜군이 가지고 있었던 鳥銃(文字 그대로 새를 잡는 총이 결코 아니다.일본에서는 鐵砲라고 불린다)의 위력 때문에 조명연합군이 공세를 취하기가 아주 난처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즉 적극적으로 적을 밀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총은 물론 유럽에서 배워온 것이지만 일본에서 1554年 자체생산에 성공하고 戰國時代를 거치면서 이의 위력을 실감한 大名(藩主)들이 앞을 다투어 도입하는 바람에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이 보유했던 조총의 數가 유럽 전체의 총보유數를 훨씬 상회하였다 하니 당시 왜군의 화력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일제사격이 가능하고 파괴력이 뛰어난 이 신식무기 앞에서는 농성을 하거나 험준한 지형에 의존하여 게릴라식 지구전을 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었는데 전쟁기간 중 이를 잘 모르는 조정 문무관들의 지나치고 무리한 독전이 많은 패배를 불러왔다는 것이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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