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무후사를 다녀온 후, 오후에 버스를 타고 두보초당杜甫草堂의 북문에서 내려 초당을 찾았다. 초당의 정문은 뒤쪽 완화계浣花溪 가의 외진 곳에 있고 북문이 청화대로靑華大路변에 연해 있어 오히려 주된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두보의 시를 좋아하였기에 어서 그를 만나고픈 마음이 앞서 버스에서 후다닥 내려 뛰다시피 발걸음을 빨리했다. 마침 연꽃 축제기간이라 그 기대가 더욱 컸다. 초당은 예상보다 매우 넓었다. 북문을 지나자 작은 개울이 모여 이룬 소沼에 청추헌聽秋軒이란 물가의 정자가 먼저 나를 반긴다. 이 7월의 더위에 ‘가을을 듣는다.’니 운치 그윽한 그 이름만으로도 더위를 다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정문 쪽으로 가서 순서대로 탐방을 하려고 오른쪽으로 불탑처럼 생긴 일람정一覽亭을 돌아 연꽃이 피어 있는 개울을 따라갔더니 모옥이 보인다. 초당인 줄 알고 얼른 가까이 가봤으나 주위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응향정凝香亭이라는 휴식공간이었다. 명색이 두보초당이라 그런지 콘크리트로 지은 자그마한 휴식공간까지도 지붕만 띠를 올려놓고서는 거창한 이름을 그럴듯하게 붙여 놓았다. 이 나라를 다니면서 자주 접하는 너무나 중국적인 모습이기에 웃음을 머금고 그대로 돌아서서 나와 버렸다. 소를 낀 개울에는 군데군데 흰 놈과 붉은 놈이 섞인 몇 송이 연꽃이 미인대회라도 하듯 향을 퍼뜨리며 제법 요염하게 하늘거리면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군데군데 이런 연꽃들이 피어 있었으나 차마 이 꽃들로 축제를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펐다. 잠시 개울가를 벗어나 시성문화원詩聖文化院으로 향했다. 두보의 일생과 그의 주요 작품이 조명 속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최신 기재를 이용해 벽에 만들어 놓은 두보의 영상映像이었다. 두 팔을 벌려 번쩍 쳐들고 있는 그의 자세는 무엇을 염원함인지? 그의 얼굴 또한 뭔가 고통에 찬 표정이었다. 자신의 불우함에 대한 염원인가, 아니면 민중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연민에서 나온 염원이던가? 먼저 정문 앞쪽에 있는 통당通堂 스타일의 넓은 대청인 대해大廨로 들어섰다. 두보의 시를 칭송하는 많은 주련이 걸려 있는 대해를 지나니 동서 양측의 진열실이 회랑을 돌아 시사당詩史堂과 서로 이어져 있었다. 시사는 두보의 작품을 이르는 말이라서인지 그곳에는 두보의 입상뿐 아니라 역대 두시 판본과 여러 외국의 번역본 120여 종 그리고 명청明淸 및 근대 명인의 서화들이 소장되어 조그만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두시언해杜詩諺解>를 비롯한 두보시집 몇이 반갑게 나를 맞이해준다. 시사당 옆 개울가를 따라 수함水檻과 흡수항헌恰受航軒이 진열관 역할을 하면서 회랑처럼 이어져 시문柴門 옆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시사당의 뒤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니 이름만 시문(삽작문)이지 지붕을 기와로 인 건물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시문을 지나니 두보를 기리는 사당인 공부사工部祠가 있었다. 두보의 평생 관직이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에 이르렀기에 그의 관직 이름을 따서 사당의 이름으로 쓰고 있었다. 이 안에는 명청의 석각과 청대 진흙으로 조소한 두보상 그리고 양 옆으로 송대 시인 황정견과 육유의 소상과 석각상이 있었다. 시성문화원에서 공부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두보를 만났다. 그들은 영상이나 돌로, 혹은 흙이나 쇠붙이로 환생해 있었지만 하나같이 생김새가 달랐다. 어떤 두보는 고난에 찬 두보였고, 어떤 두보는 원망의 두보였다. 또 어떤 두보는 목을 길게 빼고 멀리 바라보며 무언가를 갈망하는 두보였다. 그러나 공부사의 두보는 뺨에 살도 통통히 오른 것이 마치 부잣집 아저씨 같았다. 근래 사람들이 조성해 놓은 이 새로운 공간들은 초당의 마음부자 두보를 물질부자 두보로 탁하게 변색시켜 버렸다.
Ⅱ. 공부사 뒤뜰에는 귀한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정자가 숲과 물가에 줄지어 있어 그 유아함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녹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개울은 구불구불 굽이져 흘러간다. 이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니 옛 두보의 생활공간이던 영역이 나타났다. 759년 10월 난리를 피해 가족을 거느리고 감숙성의 진주秦州를 떠나 그해 12월에 성도에 도착한 49세의 중늙은이 두보는 다음 해 이곳 완화계 가에 초당을 짓고 전후 3년 9개월을 살면서 247수의 시를 남긴다. 원래의 초당은 중당 이후 이미 허물어졌으나 송 원풍 연간에 모옥을 중건하여 새로 사당을 세웠고 그 후 수차 개축하였다. 오늘날 초당의 규모는 청 가경19년(1811)의 대 개축으로 갖추어졌다고 한다. 성도에 도착한 두보는 잠시 성 밖의 초당사草堂寺에 머무르게 된다. 이 절은 완화계가에 있어 완화사라고도 했다. 아마 그가 성도로 오게 된 연유는 친구인 고적高適이 성도의 이웃 고을 팽주彭州의 자사로 와 있었기 때문이리라. 두보가 도착하자 고적은 반기는 시를 보낸다. 이에 두보도 시를 보내 ‘고사古寺라서 스님이 적어 쓸쓸하고, 빈 방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친구들이 녹을 받아 쌀을 나누어주고 이웃집에서 채소를 얻어먹는다.[古寺僧牢落, 空房客寓居. 故人分祿米, 隣舍與園蔬-<수고사군상증酬高使君相贈>중]’라고 화답하여 그의 생활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듬해 3월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백화담百花潭 북쪽이자 완화계와 만리교萬里橋의 서쪽 유정幽靜한 곳을 택하여 터를 잡았다. 기쁨에 겨운 두보는 성도성 밖의 ‘완화계 물가의 서쪽에 숲과 연못 그윽한 곳으로 살 곳을 잡았다[浣花溪水水西頭, 主人爲卜林塘幽-<복거卜居>중]’며 즐거워했다. 당시 성도성 안의 인가는 십만 호를 넘었으나 이곳은 단지 두셋의 인가만 있는 곳이었다[城中十萬户 此地兩三家-<수함견심이수水檻遣心二首>중]. 모옥이 완성되자 ‘성 밖에다 집을 지어 허연 억새로 이엉을 잇고 강을 따라 익어 푸른 들판 내려다본다.[背郭堂成蔭白茅, 緣江路熟俯靑郊-<당성堂成>중]’라며 그 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당시의 두보는 다소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해서 이전과는 달리 낭만적인 분위기도 자못 보이고 있다. 이전에는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중에 처한 어려움이나 관리생활에서 뜻을 펴지 못한 고뇌 그리고 백성의 고통에 대한 아픔으로 비분강개한 분위기가 그를 지배하였으나, 이곳 초당에 오면서부터는 ‘비록 소은은 들에 은거하는 것이고, 대은은 저자에 은거하는 것이라[小隱隱于野, 大隱隱于市]’고 하면서도, 오히려 초당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두 마리 노란 꾀꼬리는 푸른 버들가지에서 울고, 한 줄의 백로는 푸른 하늘 위를 날아가네. 창에는 서쪽 먼 산의 만년설이 보이고, 문 앞에는 만 리 길 먼 동오로 가는 배가 떠있네.[兩個黃鸝鳴翠柳 一行白鷺上靑天. 窓含西嶺千秋雪, 門泊東吳萬里船-<絶句>중]”라고 노래한 것처럼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산거은거山居隱居의 감각이었다. 초당은 창으로 멀리 천 년 동안이나 녹지 않은 서쪽의 만년설산을 볼 수 있을 만큼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숲이 짙게 우거져 꾀꼬리나 백로가 다 같이 돌아갈 줄을 잊어버린 그윽한 곳이었다. 또한 수로가 발달하여 배로 강남까지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편리한 곳이었다.
Ⅲ. 그윽하기 그지없는 그 속에서 ‘소릉少陵초당’의 비정碑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릉은 두보의 별칭이다. 사진을 통해 이미 친숙하게 안면을 텄기에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했으나 먼저 온 중국인들이 도통 비켜나 주질 않는다. 대가족이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독점하여 돌아가면서 떠들썩하게 찍어대기에 할 수 없이 오른쪽의 수죽거水竹居로 가서 비단 잉어가 떼거리로 노는 것을 구경하였다. 시대를 잘 타고난 덕분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풍성한 먹이로 살도 많이 쪄서 통통도 하다. 아마 이놈들이 당시에도 살았다면 배고픈 두보 일가가 다 잡아먹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비정으로 와보니 그제서야 조용하고 고즈넉하여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비는 모옥으로 된 조그만 누각 안에 유리로 코팅되어 자연스런 맛은 없었다. 옆에는 청나라 강희제의 아들 과친왕過親王이 비를 세웠다는 설명이 중국어, 영어, 일어 그리고 한글로 적혀 있었다. 물론 여기뿐 아니라 무후사에도 여러 볼거리들이 한글로 설명되어 있어 우리네 관광객들이 이곳에 많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비정을 지나 왼쪽으로 가니 드디어 두보의 집이 보인다. 초당 앞에는 거대한 자연석 바위를 이용하여 두보의 상을 새겨놓아 마치 문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본 두보의 상 중 가장 측은한 모습의 이 두보는 상반신 일부만 밖에 내놓고 돌 속에 파묻혀 처연하기 짝이 없으나 그래도 근엄한 인상을 잃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갑갑할까? 그 옆의 평평한 바위에는 두보가 이곳에 살던 다음 해 초가을에 태풍을 만나 결단이 난 초당을 서글픈 심정으로 읊은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의 원문이 석각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광풍이 불어 모옥茅屋의 세 겹 띠풀 위로 구르듯 지나가니 두보는 긴 밤 동안 매우 처량하여 축축이 눈물에 젖어서 ‘어찌하면 널따란 천만 칸의 큰 집을 장만해서 천하의 가난뱅이 선비를 감싸 기쁜 낯 되게 하며, 비바람에 끄떡도 하지 않는 산 같은 편안함을 주겠느뇨.[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 風雨不動安如山]’라며 사뭇 사람을 감동시키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말로 널따란 큰 집 천만 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갈만한 일정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넓은 집이 있다면 은거의 아취도 사라질 것이고 문 앞에 완화계도 필요 없을 것이며 멀리 만년설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에 시의 소재도 없어진다. 한 마디로 격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아! 언제 이런 높다란 집을 본다지, 내 집이야 홀로 무너져 얼어 죽어도 족하다만.[嗚呼! 何時眼前突兀見此屋 吾廬獨破受凍死亦足]’이라고 읊는다. 여기에서 왜 그가 넓은 집 천만 칸을 원했는지 이유가 분명해진다. 가난뱅이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곤경은 덮어두고 민생부터 먼저 생각하는 두보의 참 면목을 여실히 볼 수 있으니, 자기는 얼어 죽어도 천하의 가난뱅이들을 구제하면 된다는 것이 아닌가! 진정 그는 멋진 휴머니스트였다. 멋지게 만들어 놓은 사립문인 시문을 거쳐 초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부유한 자의 별장이라 해도 좋을 만치 잘 꾸며져 있었다. 객방이 있고 서실이 있으며 주방도 매우 컸다. 아! 뜻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두보가 상당히 잘 살았다고 알겠구나! 실소가 터져 나왔다. 또 다시 이 나라 특유의 몰상식한 문화적 양지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지독한 가난뱅이 두보가 죽고 나서 오랜 시간 후에 비로소 그의 소원인 넓은 집 천만 칸의 영역을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가난뱅이의 생활터전이 아니라 한갓 여유 있는 자의 구경거리로서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두보를 만난다는 것은 물론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정신적인 안락을 누린 이곳의 생활에서 그는 많은 낭만적인 시를 쏟아낸다. 그는 조그마한 모롱이에 밭을 갈아 농부가 되어 보기도 한다. ‘동그란 작은 연잎이 동실동실 떠있고, 가느단 보리에서 꽃이 사뿐히 진다. 집을 마련해서 이곳에서 늙으려니, 농사를 짓게 돼 임금과 떨어짐이 아득하여라.[圓荷浮小葉, 細麥落輕花. 卜宅從玆老, 爲農去國賖-<위농爲農>중]’라며 한편 보리농사의 기쁨을 대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자급자족은 턱도 없어 ‘녹을 톡톡히 받는 친구에게선 소식이 끊겼고, 노상 굶는 어린놈의 낯빛은 처량도 하다[厚祿故人書斷絶, 恒饑稚子色凄凉-<광부狂夫>중]’면서 탄식을 해댄다. 우리네 고등학교 교재에도 실려 많은 감흥을 주고 있는 <강촌江村>에서는 여름철 그의 한적한 초당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오직 바라는 것은 병에 걸리지 않는 건강일 뿐 모든 것이 조촐하고 만족스러운 안분지족의 결정結晶을 노래한 것이 아닐까? 비록 한고寒苦한 생활이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그의 시는 여전히 아취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Ⅳ. 다리와 정자가 서로 뒤섞여 어울려지는 화경花徑의 사립문으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시멘트로 덮여 있었고 양 옆이 붉은 벽돌담이어서 자연적인 운치라고는 전혀 없었다. 단지 담을 따라 듬성듬성 우거진 대숲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듯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잠시 완화사浣花祠에 들러 완화부인 임씨任氏의 화상畵像을 보았다. 살이 통통한 것이 전형적인 당나라 미인상美人像이었다. 그녀에 얽힌 전설을 보니 ‘완화부인 임씨는 당나라 대력 연간의 사람으로 본래 완화계 가의 가난한 집 딸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만신창이의 승려가 아주 더러운 옷을 입고 지나가면서 옷을 빨아주길 부탁했으나 마을사람들이 모두 더러워하였고 오직 그녀만이 승려의 말을 공손히 받들어 완화계에서 빨았다나. 그녀가 옷을 빨 때마다 연꽃이 흘러내려 와서 그녀의 손에 잡혔는데, 꽃을 주우면 또다시 꽃이 떠내려 오곤 했다. 옷을 빨아들고 승려에게 가보니 승려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도 간 곳을 몰랐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이곳을 백화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침 미복을 하여 이곳을 지나던 서천절도사 최녕崔寧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그녀를 데려와 첩으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처가 죽자 그녀를 정실로 삼았고 이후 그녀를 완화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 허황한 생각이 들었지만 중국판 신데렐라 같기도 하고 마치 우리네 옛 민담과도 흡사하여 정겹기까지 했다. 완화사를 나와 계속 가서 붉은 벽돌담이 끝나는 지점에 가니 ‘당풍유운唐風遺韻’이란 편액이 걸린 건물의 입구가 나타난다. 이 입구의 흰 벽면에는 연푸른 타일로 ‘초당’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놓았다. 글씨 자체는 예술적인 가치도 없고 멋대가리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몰려 제법 심각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과거 모택동 주석이 방문하여 직접 이 앞에서 사진을 찍은 곳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이 숭배하는 모주석이 자기들처럼 여기 이 자리에 왔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풍유운 옆쪽은 대아당大雅堂의 측면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아당 안은 현대 작가들의 석조조각 전시장이었다. 도연명과 이백 그리고 두보의 여러 상을 위시하여 백거이 이하 이상은 황정견 육유 등 중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당송의 유명한 여러 문인의 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여 그들의 시심과 인간적 고뇌를 심미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한 사람씩 찬찬히 살펴보면서 잠시 그들의 당시 삶의 모습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비록 지금은 여기서 두보에게 얹혀있지만 관직생활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전원생활을 택한 도연명, 당대의 세도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한 기개의 이백 그리고 선불교에 심취한 백거이 등에서부터 일생을 여진족에 대항하여 조국의 북방 수복을 기원했던 남송의 멋쟁이 육유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대시인이요, 풍류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이는 농기구를 들고, 어떤 이는 붓을 들고 어떤 이는 말을 타고 혹은 편안하게 혹은 고난에 찬 모습으로 돌 속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대아당 앞의 넓은 마당에는 관복을 입은 두보가 가녀린 몸으로 앞에 펼쳐진 연못의 연꽃 쪽을 향해 돌 위에서 다리를 뻗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마치 무엇에 불만이 있는 듯 크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 이유를 알겠다. 대아당 편액 밑에 한 아가씨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붉은색 실크 옷을 입고 앉아 탁자 위의 해금을 타고 있었다. 연주에 너무 몰입된 때문인지 옷매무새가 덜 여며져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아마 이 모습 때문인가? 아니면 연꽃 축제라고 떠들썩하게 객을 초청해 놓고 빈약한 꽃으로 맞아드려 자기 이름을 팔아 흠집을 내는 후손에 대한 역겨움일까? 대아당을 돌아서 분경원盆景園을 거쳐 두시목각랑杜詩木刻廊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외진 곳으로 두보의 시를 목각해 걸어놓은 것 뿐이라 그런지 아니면 두시 자체에 흥미가 없어 그런지 인적이 없었다. 두시 몇 개를 골라 어설픈 중국어로 크게 낭송해 보았다. 갑갑하던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다시 그윽하고 굽은 개울을 따라 들어가자 길가에는 녹색 풀이 요처럼 깔려있었고 두보가 좋아하는 녹나무와 청죽이 심어져 있었다. 개울을 따라 미처 가보지 못한 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아마 외곽을 돈 것 같았다. 갑자기 거대한 목탑 형식의 4층 건물이 나타난다. 만불루萬佛樓이다. 이곳을 파니 옛 건물의 주춧돌과 유구가 나와 이를 토대로 복원을 했다고 한다. 혹 여기가 두보가 처음 성도에 와서 더부살이하던 초당사의 옛 터는 아닐까?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니 초당 주변의 성도 시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두보가 이곳에 왔을 때 단지 두세 집밖에 없던 한적하던 곳이 이제는 높은 건물들이 우뚝하니 솟아 서로 다투고 있는 도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탑의 난간에서 어른 두 사람과 한 어린이가 우리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한국 사람이라면서 인사를 하니 같은 대구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부자간으로 북경에 여행 와서 사흘을 보낸 후에 마침 성도에 있는 친구와 연락이 되어 잠시 시간을 내서 친구를 보러 어제 성도에 왔고, 내일 다시 북경으로 해서 귀국한다고 했다. 성도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항공회사 잡지를 무심코 펴보았다가 거기에 삼대 째 평생을 새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는 성도 인근 지역 늙은 어부의 이야기가 나오기에 오전에 친구를 졸라 찾아갔다가 마침 시간 여유가 있어 초당에 왔단다. 가마우지의 목을 졸라 묶어 고기를 잡는 것이 신기하여 보러 간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이곳 일정이 짧아서 안타깝고, 중국말을 몰라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가마우지로 고기 잡는 것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있었고, 현재 중국에서는 계림桂林 일대의 이강灕江에서 성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더니 언젠가 계림에 꼭 한 번 가서 봐야겠단다. 먼 곳에 와서까지 신기해하는 것을 끝까지 찾아보는 그 열성이 부러웠고 아버지와 아들이 오순도순 같이 여행을 다니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남은 여행의 안녕을 빌어주고는 그들과 헤어지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웃으며 한 마디 던졌다. “인간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주는지는 몰라도 동물에게는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요?”
Ⅴ. 화경을 걸어 초당의 남문으로 빠져 나왔다. 두보의 초당은 더 이상 초당이 아니었다. 대저택이었다. 너무나 상업성으로 치장해 놓아 오히려 두보가 환생하여 온다면 자기 집을 찾지 못할 것이 뻔하다. 어떻게 찾아 왔더라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말 것 같았다. 남문 앞 시가대도詩歌大道 건너에 완화계가 흐르고 있었다. 비온 뒤끝이라 탁한 물이 양쪽의 콘크리트 둑 사이에서 제법 많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 갑작스레 큰 소리의 괴성이 들렸다. 남문 맞은편 녹나무 그늘 아래 조그만 리어카에서 빙수를 만들어 파는 짧은 머리에 때 묻은 반바지와 쫄대 내의만 걸친 40대 사내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호객을 해대는 소리였다. 내가 아주 더워보였던 모양이다. 시원시원하게 ‘5위안에 달고 시원한 빙수 한 그릇’이라며 제법 코믹하게 소릴 지른다. 장사꾼의 음색도 재미있고 날씨도 워낙 더웠던 터라 한 그릇을 청했다. 옛날 내가 어릴 적에 동네에서 사먹던 알록달록한 여러 원색의 물감을 뿌리고 팥을 얹던 향수에 젖은 바로 그 빙수였다. 완화계 가의 녹나무 아래에서 먹는 한 그릇의 빙수는 나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다 비워가자 이 아저씨 내 그릇을 뺏다시피 가져가더니 얼음을 더 갈고 오색찬란한 물감을 또 뿌려주는 것이 아닌가! 그저 기분이 좋아 내 입에선 연신 “세세[謝謝]” 연발이었다. 옛 향수에 취해 불량식품을 가릴 기분이 아니었다. 며칠 후 성도 중심가인 춘희로春熙路에 갔더니 제법 깨끗한 빙수가 한 그릇에 겨우 1위안 하였지만 그래도 이 완화계의 비싼(?) 빙수가 조금도 기분이 나쁘다거나 언짢지가 않았으니! 이곳은 차도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이라서 완화계를 따라 강을 완상하며 걸었다. 문득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이곳에서, 고등학교 때 열심히 외운 <강촌>이 생각난다. ‘완화계 한 구비가 마을을 안고 흐르니, 긴 여름 강마을엔 일마다 그윽하다. 멋대로 왔다, 멋대로 가는 지붕 위의 제비요,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운 물 가운데 갈매기라. 아내는 종이에다 장기판을 그리고, 아이는 바늘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 숱한 병에 오직 필요한 것은 약물이니, 하찮은 몸이 이밖에 또 뭣을 바라랴.’ 두보가 어디쯤에서 시를 읊조리고 앉아 있었으며, 두보네 아이는 또 어디에서 쪼그리고 앉아 낚시를 만들었을까? 나 자신 두보의 제비처럼 멋대로 오가니 그가 날 보면 뭐라고 말을 할까? 완화계와 헤어져 두보초당 앞의 가장 번화한 대문인 북문 쪽으로 걸어오니 이 일대의 상호는 하나같이 두보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파트도 초당xx, 상점도 두보xx 등이다. 완전 두보가 먹여 살리는 꼴이다. 갑자기 내리는 빗속에서 어슬렁거리며 청화로로 나왔다. 이때부터 초당 동문 앞의 버스 정류장까지 올 동안 나는 인도의 바닥을 내려다보며 걷는 재미에 빠져 버렸다. 인도의 블록에 두보의 시 한 수가 새겨져 있고 몇 발자국 간격으로 사이사이에 사군자四君子가 각각 순서대로 하나씩 새겨져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번들거리는 블록에서 두보의 초당 시대의 오언절구인 <서교西郊>, <전사田舍>, <유자游子> 등의 시와 사군자를 하나하나 음미하며 계속 따라 걸었다. 갑자기 대나무를 새겨놓은 옆에 진황색 페인트로 숫자를 써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서류위조가 필요할 때 연락하라는 전화번호였다. 문화와 반문화反文化가 같은 인도의 블록 위에서 함께 비를 맞으며 공존하고 있었다. 이 인도 위를 두보의 후손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이 블록을 흙발로 마구 밟고 지나면서 오히려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두보가 이런 작태를 봤다면 대체 어떤 시를 읊었을까?
Ⅵ. 숙소인 4인1실의 다인방多人房으로 돌아오니 앳된 중국청년이 먼저와 있었다. 자기는 상해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현재 혼자 여행 중으로 모레쯤해서 운남의 여강麗江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이 녀석 대뜸 축구 이야기를 꺼낸다. 아시안 컵 축구대회 소식을 아느냐는 것이다. 3일 전에 상해에서 하루를 보낼 때 본 TV에서 중국 축구가 예선 첫 게임에서 말레이시아를 5대1로 이겼다고 장시간 온갖 화면으로 너스레를 떨더니 마지막에 큰 자막으로 ‘한국 축구가 병들었다[韓國足球病了]’라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바레인에게 진 것을 비웃듯 크게 떠들어대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예선에서 한국 축구가 부진하다는 것을 인정하자 중국 축구 자랑에 열을 올린다. 조그만 녀석이 낭창하게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이 얄밉다. 내가 대꾸도 않고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자 시무룩해지더니 제풀에 입을 다문다. 어린 녀석이 버릇없이 까부는 게 얄미워 그저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오늘 오전에는 제갈량을 쫓아다니고 오후에는 두보를 찾아다녀도 결국 내 품성을 기르지 못했구나.’ 라는 자괴감이 들어 어색하지만 씩 웃어주었더니, 이 녀석 또 말을 걸려고 한다. 세면도구를 들고 부리나케 방을 나왔다. 며칠 후 티베트의 숙소에서는 인터넷이 가능했다. 검색해 보니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리가 이라크와 4강전을 한단다. 예상도 못한 결과에 환희가 일었다. 처음 사우디와 비긴 우리나라는 바레인에게 패하였지만 결국 1승1무1패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4강까지 올라왔고, 중국은 그 청년의 염원을 하늘이 들어주지 않았는지 역시 1승1무1패의 전적을 올렸으나 조예선에서 탈락하였단다. 그 녀석을 티베트에서 만났더라면 위로의 말이라도 해줄 텐데! 지금쯤 중국 어느 구석에서 자기네 대표 팀의 탈락을 아쉬워하며, 한국의 중늙은이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도 한마디]
박문송
범은이의 기똥차게 재밋는 중국여행기를 읽느라 세월가는 줄 모른다는 표현이 우째 좀 이상하네. 워낙 분량이 많아 단숨에 읽기가 힘들다는 말 같기도 하고...암튼 많은 동기들이 두루 경탄해 마지 않는 훌륭한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시은이 대은인가? 물가가 아닌 2박의 전주 나들이로 하루 늦어 글을 올렸네. 양사재 한옥은 옛 정취만 불러 일으키고 최명희 작가의 혼불은 정신을 일깨우네. 머리 속에 남는 말 "아름다운 세상, 잘 살다 갑니다" 부끄러움에 떨었네. 전주에서 받은 중관이 전화 고마웠고 만나 탁걸리나 함 걸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