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6호 공항버스가 포동공항을 출발한 뒤부터도 줄곧 내 머릿속은 “어디로 갈까?”라는 명제로 복잡해지고 있었다. “실크로드를 돌아다닐 것인가 아니면 티베트로 튈까!” 비행기를 타기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이 선택의 어려움은 상해에 내려 버스를 타서도 근 1시간 남짓 요리조리 계산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쉬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여, 미처 결정도 못한 채 종점인 상해역 앞에서 내렸다. 갑자기 7월의 폭염 자락이 나를 덮친다. 숨이 확 막히는듯하다. 그러자 며칠 전 어디선가 본 기사 한 토막이 유달리 머리를 스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신강新疆일대는 연일 38도가 넘는 무더위라고. 나는 유난히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인데, 이 한 토막의 기억이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그렇다, 더운 실크로드보다는 여름에도 서늘하다는 티베트로 가자.” 이렇게 정하고보니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기차표를 잘 구해야 될 터인데!” 역의 매표소에 갔더니 상해에서 라싸 행 청장철도는 이틀에 한번 씩 있는데, 7월에는 짝수 날만 운행하기에 오늘은 출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예 차표조차도 없다고 한다. 벌써 열흘 전부터 예매로 동이 났단다. 암표상에게 접근하여 “라싸?”하고 물었더니 시큰둥하니 대꾸조차 없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인근의 비행기 표 파는 곳에 들러 라싸 행을 찾았더니 서안西安을 경유하여 갈아타고 가는 비행기 편이 있지만 값이 장난이 아니다. 편도만 무려 중국 돈 4000원[당시 1위안은 한화로 약 130원] 이상이나 부르는 것이 아닌가. 어휴! 비상금까지 넘봐야 할 판이라 미련이 남았지만 포기하고는 일단 성도成都로 가서 티베트에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기차 매표소로 가서 밤에 출발하는 성도행 표를 달랬더니 오늘 침대석은 이미 매진되었다고 한다. 하루하고도 반이나 딱딱한 좌석의 번잡한 틈에서 보낼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결국 다음날 아침 9시 30분경에 출발하는 기차의 롼워[1등 침대칸] 하단 표를 끊고 말았다. 매표소 앞을 나오니 온 몸에 땀이 흥건했다. 태양마저 날 보기가 민망했던지 이미 서쪽 빌딩 숲속으로 이글거리는 자태를 숨겨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는 남은 열기로 숨통을 끊으려 설쳐댄다. 그렇지만 모처럼 갖는 상해에서의 몇 시간의 여유를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역 부근에 숙소를 정하고는 반년 만에 들린 상해 소요逍遙에 나섰다. 먼저, 역의 서쪽 편 대통로大統路 차엽시장부터 찾았으나 다 뜯겨 빈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우리네 재래시장과 흡사했던 이 시장은 전국에서 온갖 종류의 찻잎이 다 모여드는 도매시장으로 현대화된 북경北京의 마련도馬連道 차시장과는 달리 또 다른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소규모의 수많은 차가게 사이를 헤쳐 나가기만 해도 차향이 코를 찔러 차를 사거나 말거나 그저 기분은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올 때 마다 시간이 있으면 반드시 한 번 돌아다보는 곳인데 도시 재개발로 뜯겨져나가고 차 시장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단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앞으로 나오자 광장 군데군데에서는 아예 이불뭉치와 큰 짐을 옆에다 두고 여러 일가족들이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노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름철이라 제법 야영의 멋도 있을 것 같지만 만약 나 자신이 그 처지가 되면 오히려 난감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들을 살펴보았더니 하나같이 태연하고 당당하였다. 우리네와 달리 그다지 남을 의식하지 않는 중국인의 일면을 엿본 듯하다. 운남로雲南路 먹자거리의 ‘소소흥小紹興’[닭요리 전문점]을 찾아가서 지난번에 순서를 기다리다 지쳐 먹기를 포기한 바이짠지白斬鷄와 면으로 저녁 식사를 때우고는 남경동로 보행가를 홀로 어슬렁거렸다. 세계 굴지의 번화가에서 최신 유행으로 치장한 현란한 상해의 젊은 남녀들과 어깨를 부딪혀가며 목적지도 없이 두리번거리는 이 맛도 내가 느끼는 천하 일미임에야 어쩌겠는가! 외탄外灘에서 땀을 훔친 후에 황포강의 강바람을 마주하며 멋진 야경 속에서 먹는 하미과(哈密果)[신강 참외] 꼬지의 쿨한 맛도 이에 비견되랴? 상해역 앞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넓은 땅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대로의 익명성을 즐기는 것처럼(?) 나도 외국에서 은근히 익명성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 항상 신독愼獨이란 말을 새겨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나 마치 탈을 쓰고 있는 듯한 자유로움 앞에선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인민공원에서 남경동로를 거쳐 외탄까지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즐거움 가운데에서도 떠나지 않는 단 한 가지 생각은 “부디 성도에서는 티베트 가는 교통편이 있어야 할 텐데” 뿐이었다.
Ⅱ. 역 인근의 슈퍼에 가서 1박2일 동안 먹을 라면과 간식거리, 과일과 물 등을 충분히 준비하고 기차에 올랐다. 중국에 와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돈의 위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기차이다. 롼워는 한 칸에 4개의 침대가 아래위로 서로 마주보고 있어 비교적 조용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지만 돈이 비싸다. 그렇지만 돈은 비싸도 그 값은 하는 것 같았다. 역마다 란워 대합실이 따로 있어, 일반 대합실처럼 명절 대목 시장판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 새치기로 뒤로 밀리면서도 온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물러서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으며, 개찰을 할 때 몸 따로 팔 따로 그리고 짐은 짐대로의 극한상황에 맞닥뜨릴 일도 없는 것이다. 대합실에서 여유롭게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있다가 일반대합실의 여객들보다 먼저 개찰하여 유유자적 내 칸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내 칸을 찾아가자 승무원 아가씨가 예쁜 웃음으로 반가이 맞아준다. 장장 하루 반 동안 마주칠 사람인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옆 칸보다 운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한 량뿐인 란워라서 특별한 배려인가! 나의 맞은 편 일층 침대와 내 바로 위의 침대는 사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중국인 부부가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위 침대는 주인도 없이 덩그마니 비어있었다. 창밖으로는 강남의 물길 따라 생겨난 도시들이 하나 둘 지나간다. 소주蘇州, 무석無錫, 상주常州, 진강鎭江, 단양丹陽 ---. 모두 역사성이 서려있는 곳들이다. 그 도시를 지날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연전에 찾았을 때의 정경이 다시 파노라마 되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 강남은 정취 있는 물길이나 풍류 문인들의 흔적을 느끼기에는 많은 거리감이 있었다. 눈을 들어 멀리 매연 속에 흐릿한 윤곽의 호구탑虎丘塔을 바라보는 소주 경내에서조차도 눈길을 기차 길 옆으로 옮기면 반드시 포클레인 떼가 움직이는 것만 보였다. 농가를 아파트로 지어 철로변 정화사업을 벌이는 모양이다. 군데군데 대규모 재개발 공사로 파헤쳐 놓은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지금 중국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다녀보니 21세기의 오늘, 중국의 거대한 땅덩어리는 몸살을 앓고 있었고, 하늘은 웃음을 잃고 있었다. 얼핏 선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이미 남경南京의 장강대교를 지났는가 보다. 곧 안휘성安徽省의 저주滁州를 스쳐 지난다. 잠깐 내려서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醉翁亭을 찾아가고픈 생각도 들었지만 기차는 정차하지 않고 그냥 잽싸게 지나가버린다. 그 와중에서 낭야산瑯琊山을 찾아본다. 아직 저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오직 당송팔대가 중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송나라의 구양수가 그의 명작 <취옹정기>의 서두에서 ‘저주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 산이다. 그 서남쪽 여러 봉우리는 숲과 계곡이 더욱 아름다우니 이를 바라보면 초목이 무성하고 깊고 빼어난 산이 낭야다.’라고 한 구절을 상기하며 찾아보는 수밖에 방도가 없질 않은가. 그러나 꽤 높은 산은 보이질 않고 구릉 같은 낮은 산들에 에워 쌓여 있었다. 여긴가, 저긴가? 눈어림으로 봐서 그래도 높은 곳을 골라 내 마음대로 낭야산으로 낙점해 버렸다. 그리곤 취옹정을 찾으려 하니 취옹정이 취했는가, 내가 취했는가! 송나라 인종 때(1045년) 39세의 혈기 방장한 구양수가 조정에서 내몰려 저주의 지사로 내려왔다. 이곳 낭야산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산승山僧 지선智僊이 막 지은 정자를 취옹정이라 이름 부르고 지선과 더불어 세월을 유락하며 스스로를 취옹이라 자호하였던 것이다. 그가 정말 술에 취해 취옹이라 한 것도 아니고 항상 술에 파묻혀 있어 취옹이라 한 것도 아니니, ‘조금 마셔도 문득 취하니 ---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산수 간의 유람에 있음이라. 산수의 즐거움을 마음에 얻어서 이를 술에다 핑계한 것이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 몰아沒我 속에서 산에 취하고 물에 취하고 자연 속에 취하며 여민동락與民同樂한 것일레라. 내가 아는 한문학자 한 사람은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입신양명하라고 구양수의 이름자를 따서 수修자를 넣었다고 나에게 자랑한 적이 있었다. 왜 그의 이름을 넣었는가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중국 역사에서 그이만큼 수壽와 복을 누린 사람도 드물다는 것이다. 어릴 때에야 아버지가 일찍 죽고 홀어머니와 함께 숙부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렵게 공부하였지만 23살 때부터 관리생활을 시작하면서 적극적인 생활태도로 관운도 퍽이나 좋았다는 것이다. 중간에 한때 폄적되기는 했어도 오지가 아닌 풍광이 뛰어난 곳이어서 글을 쓰며 편안히 보낼 수 있었고, 고위직으로 수명대로 잘살았으며, 무엇보다도 문장의 대가로 인구에 회자한다는 점을 들었다. 창 밖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구양수의 우언寓言 산문 <벌수기伐樹記>의 말미에 ‘대개 사물의 행이나 불행은 그가 처하고 있는 처지를 볼 따름이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장자莊子의 ‘가죽나무와 떡갈나무는 재목이 못되어 천수를 누렸고, 계수나무와 옻나무는 쓰임이 있어 손상되고 요절하였다’라는 무용론無用論으로 자신을 보전하는 소극적이고 허무적인 사상과는 달리, 모든 사물의 행이나 불행은 그것이 갖고 있는 자질과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파한 것이니, 어떤 사람이든 자질을 갖춰 사회에 유익한 인물이면 틀림없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적극적인 인생관이 이 순간 이국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나에게 한문학자의 얼굴과 함께 갑자기 와 닿는 것은 왜일까?
Ⅲ. 창밖으로 펼쳐진 이국의 풍광은 어떤 모양이든지 호기심 덩어리였다. 그 호기심에 나도 취옹처럼 취해버렸는가? 나도 몰래 취한 듯 스르르 다시 잠에 빠져 버렸다. 갑자기 부산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기차는 회수淮水가의 안휘의 큰 도시 방부蚌阜에 도착했다. 지금부터 불과 대엿새 여 전에 대홍수로 국제적 매스컴을 탔던 지역의 중심도시이다. 아직도 이 일대의 강하는 일렁이는 흙탕물로 그득하였고 주변의 침수된 가옥과 도로도 많이 눈에 띠여 당시의 참상을 알려주는 듯했다. 중국행 비행기에서 읽은 <상해만보上海晩報>에서는 현재 회하淮河의 큰물이 강소성 홍택호洪澤湖로 유입되어서 호수 범람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었으니, 이곳은 벌써 물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흔적만 남았을 게다만, 기찻길 옆에서만도 그 참상이 이러하니 가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겠다. 방부에서 사천의 광원廣元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30대 부부와 어린 딸 및 가족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남녀 등 5명이 탔다. 그들은 열차 사정으로 3명은 우리네 옆 칸으로 들어가고 머리를 빡빡 깎은 작지만 어깨가 짝 벌어진 마치 우리네 조폭스타일처럼 보이는 가장이 우리 칸 위층에 자리 잡았다. 역을 출발하자 한동안 떠들썩하던 열차는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하니 밖을 내다보자 어느덧 기차는 안휘성을 벗어나 다시 강소성江蘇省으로 들어가서 성省의 서북단에 있는 서주徐州 경내로 들어섰다.
Ⅳ. 서주는 강소, 산동, 안휘 그리고 하남성의 경계지역으로 예부터 황하를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나 정작 중요한 것은 역사성이 매우 강한 찬란한 문화도시라는 점일 게다. 옛 요임금이 팽조彭祖를 여기에 봉했다는 전설에 의해 한때 팽성彭城이라 불렸고, 우禹임금 시대에는 이미 구주 중 하나로 발전하였으며 춘추전국시대에는 송의 도읍지로 있는 등 오랜 역사의 도시이다. 특히 항우項羽가 한과 더불어 쟁패전을 벌일 때는 초楚의 수도이기도 했는데 희마대戱馬臺 유적은 당시 항우가 초군을 열병했던 곳이라 한다. 이곳 구리산九里山은 한신韓信과 번쾌樊噲가 항우를 포위하여 핍박했던 곳이며 계명산鷄鳴山은 장량張良이 피리소리로 초병을 혼란케 한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한초漢楚의 장기판 싸움보다는 이곳 어디 뫼인가 있을 쾌재정과 방학정放鶴亭 가를 맴돌고 있었다. 송 희종 연간(1077년)에 소동파蘇東坡가 이곳 지주知州로 부임하여 약 2년간 재직하였다. 어느 날 이 정자에서 노닐며 기문記文을 지어, ‘현자의 낙은 쾌재라! 바로 이 풍류로구나.’(賢者之樂, 快哉此風)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 정자를 쾌재정快哉亭이라 불렀다고 하니 그 경관 또한 수려한 곳임에 틀림없으리라. 또 그는 운룡산록云龍山麓의 방학정에도 자주 가서 즐겼으니, 그곳에 놀러가 주인에게 ‘그대 집에 맛있는 우물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동헌에 돌아갈 때 애걸해서라도 병에 물을 가득 채워 돌아가야겠네.’(<유장산인원游張山人園>聞道君家好井水, 歸軒乞將滿甁回)라고 하였으니 물 또한 빼어났으리라. <수호전水滸傳>의 무대 양산박도 또한 서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 풍광을 더는 말해서 무엇 하랴! 물론 후대 사람 시내암施耐庵이 약간의 역사에 허구를 혼합하여 각색한 것이겠지만 양산박에서 108호걸들이 들고 일어난 시기가 동파가 서주를 떠나고 나서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때라서 아찔한 느낌을 가져보는 치졸함도 혼자서 즐겨본다.
Ⅴ. 서주의 도심 주변과 그 외곽의 산수를 내 한눈에 다 집어넣으려는 듯이 한참을 열심히 밖만 내다보았다. 바깥의 경물은 빨리도 뒷걸음치더니 어느덧 기차는 고대 상商왕조의 한때 도읍지였다는 상구商邱를 지난다. 이제 하남河南 땅으로 바야흐로 중원이다. 옛 중국의 중심으로 고대의 숨결이 어려 있는 곳을 물끄러미 차창 밖으로 내다본다. 이상하게도 별 흥취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무료함을 달래보려고 사천성四川省의 여행안내 책자를 꺼내 들었다. 바로 티베트에 들어가지 못하여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성도成都나 인근의 어디를 다녀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를 생각하며 찬찬히 살폈다. 제갈량諸葛亮의 무후사武侯祠, 두보杜甫의 초당, 설도薛濤의 망강정望江亭 등을 머릿속에 그려 보니 제법 흐뭇해진다. 몇 번이나 살펴보니 이것마저도 지겨워진다. 멍하니 창밖만 무료히 내다보고 앉았다가 우연히 맞은 편 침대의 젊은 남편과 눈이 마주친다. 슬쩍 웃어주었더니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건다. “니쓰 썸머 띠팡런?”(你是 什麽 地方人?). 여기까지 올 동안 근 7시간이나 좁은 공간속에서 이제껏 서로 냉랭하게 말 한마디 없었던 묵직한 분위기가 “당신은 어디 사람입니까?” 이 한 마디 말로 인하여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내가 중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들 부부와 이층에 있던 방부에서 탄 조폭풍의 사내가 모두 갑자기 관심을 표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성도에 가서 여행허가서를 받아 티베트로 가려고 한다고 하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내지른다. 사천이 고향인 자기들로서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언제든 꼭 한번 가려고 벼르는 곳이란다. 그러면서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자기들 나름대로 티베트에 가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들의 설명은 이미 내가 조사하여 익히 알고 있는 것의 일부 기본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이국인에게 친절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고마움을 느꼈다. 특히 조폭풍의 광원 사내는 옆 칸으로 가더니 지도를 갖고 와서는 성도에서 육로로 티베트 가는 루트를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서 자기 고향 광원 인근 검각과 잔도棧道의 역사성과 수려함을 설명하면서 안 가봤다면 꼭 한번 가보라고 권한다. 다혈질적인 면은 있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정이 있고 착실한 사람이었다. 가족과 함께 방부의 처가 집에 가서 며칠 머물다가 처남이랑 처제와 함께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중국인 부부도 덩달아 자기들이 사는 사천 의빈宜賓도 물 좋고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자랑을 한다. 물론 의빈은 귀주貴州 땅에서 나는 마오타이(茅台)주와 더불어 중국술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명주銘酒 우량예(五粮液)의 고장이다. 또한 중국 제일의 죽림으로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촉남죽해蜀南竹海’의 장관이 있는 곳으로 산수가 빼어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사천인들 사이에 끼여 그들의 사는 곳에 대한 이야기와 사는 방식의 진솔한 모습을 듣자 사람이란 똑같은 존재이고 살아가는 방식도 대동소이함을 느꼈다.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길 하다가보니 기차는 곧 옛 송의 도읍인 개봉開封에 도착하였다. 조폭풍의 사내는 옆 칸에 빈 침대가 생겨 그리로 옮겨가고 그와 맞바꾼 개봉에서 탄 40대 후반의 중년 사내가 성도까지 간다며 우리 칸으로 들어왔다.
Ⅵ. 황하의 범람으로 인하여 몇 차례나 진흙이 덮고 또 덮어 옛 송의 도시나 명대 모습은 흙 속에 파묻혀 이젠 고고학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는 개봉, 우리들에겐 <포청천>이란 TV극으로 인해 친숙해진 바로 그 개봉부이다. 2006년 여름 운남에 갔을 때 대리고성大理古城의 난전에서 늙은 노파가 제법 고古티가 나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팔기에 번연히 복제인줄 알면서도, 그래도 그림이 볼 만하고 또 노파가 측은하여 하나 사갖고 와서 열심히 들여다보며 감탄한 적이 있었다. <청명상하도>는 북송 말 한림학사로 있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개봉(변경汴京)의 청명절 모습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으로, 도읍에 온 봄의 풍광과 떠들썩한 변하汴河의 나루 주변 그리고 시끌벅적한 개봉성 안의 번화한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당시의 개봉이 매우 번성한 곳임을 알 수 있고 당시의 사회생활과 경제 활동에 대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한 때는 중국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이던 곳이 지금은 영락하여 소규모 도시로 남았으니 세월만큼 무상함이랴! 그러나 사람은 갔으되, 그 흔적만큼은 지울 수 없어 천추에 남아있으니! 티베트를 가기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문학과 역사의 도시 성도를 향하여 기차는 하루를 더 숨 가쁘게 달려가야 한다. 달리는 차창 사이로 바깥은 어느새 잔잔한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나도 한마디]
봉영
히야~ 이렇게 재미있는 중국여행을 방콕에서 즐길 수 있다니...우리 동기 범은이가 자랑스럽다. 자식놈들은 물론 친척들에게도 이 책 한 권씩 선물해야겠다.
게시판에 문곤이가 소개한 책이네. 허허 줄啄同時가 되어버렸군. 사진은 담는 기술이 없어 여기에 싣질 못했네. 한 번에 다 넣으면 보기 귀찮을 것이고 하여 연재의 형식을 취했네. 지난 3월 중국 운남의 시쌍빤나西雙版納의 소수민족촌에 한 달 머물다 돌아와서 지금은 그때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