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면 아들은 전화요금을 누가 내는지 부터 묻는다고 했다. 아들은 자신이 요금을 부담해야 한다면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빨리 끊으라고 아버지에게 재촉을 하고, 아버지가 요금을 낸다고 하면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하면서 오래 통화를 하더라고 했다.
1970년대 초 한국을 방문한 토인비는 자신의 경우를 들면서 “한국의 가족제도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말한 인터뷰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가 한국의 가족제도를 부러워 한 것은 한 집안에서 여러 대가 모여 살고 있는 단순한 외관이 아니라 거기에 어른이 있고, 효도가 있고, 사랑이 있는 가정의 유대와 질서였다.
토인비가 한국을 다녀간 70년대만 해도 우리의 가정은 세계적인 석학의 푸른 눈으로 볼 때 부럽다고 할 만큼 어른이 있었고, 그 어른이 가정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어른은 꼭 무엇을 많이 알거나 많은 것을 가졌거나 무슨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집안의 어른이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권위를 인정해 주고 복종했던 것이다. 그래서 늙고 병들어 벽을 지고 있어도 집안에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도 산업화가 되어 가정이 핵가족화되면서 집안에 어른들의 쉴 곳이 없어지고, 아이들이 보다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어떤 나이 많은 아버지가 아들집에 다니러 갔었다. 며칠 있는 동안에 집안의 상황을 살펴보니, 그 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람은 손자이고, 두번째는 며느리이고 세번째가 가장인 아들, 네번째는 애완용 개, 다섯번째는 식모이고, 자신은 마지막 여섯번째인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3등 애비야, 잘 있어라. 6등은 간다”고 하면서 집을 나왔다고 한다. 이 집안에 옛날과 같은 어른이 없어졌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른이 없는 것은 집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어른들이 있어 그들의 말은 곧 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들이 마을의 질서를 잡고 풍기를 바로 세워 마을의 미풍양속을 지켜 왔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어른들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아이들의 목소리만 높아졌다.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면 “또 그 소립니까?”로 반응한다. 그래도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 이번에는 인터넷이 어떻고 디지털이 어떻고 하며 어른들의 기를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기죽은 어른들은 말해 봐야 본전도 못 찾겠다 싶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전차 안에서 젊은 남녀가 붙어 앉아 마치 자기들 안방에서 하는 것처럼 행동해도 아예 못 본 것처럼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다 드디어 도덕불감증에 걸려 전차 안에서 정신나간 사람이 라이터를 켜 시트에 불을 붙여도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엄청난 참화를 입게 된 것이다.
나라에도 어른들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아이들의 목소리만 요란하다. 어쩌다 답답해서 한 마디 하면 “수구적이다” “반(反)통일적이다”하며 몰아붙인다. 조심해서 말해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어뜯는다”고 악담을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마구 쏘아댄다.
고건 총리가 교육부총리로 오명 아주대 총장을 추천한 것을 놓고 그들의 빠른 무기라고 자랑하는 인터넷을 통해 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붓고 총리에게도 무례한 말을 쏟아냈다. 이 바람에 오 총장은 스스로 사양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말을 잘 듣는 어른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왜 좀 당당하게 어른의 자리를 지키면서 교육의 수장으로 버릇 없는 아이들을 가르쳐 보겠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3·1절에 두 개의 상반된 성향의 집회가 계획되고 있을 때 사회 각계의 어른들 188명이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자제를 요청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었다. 사후에 간청하는 어른이 아니라 사전에 찾아와 의논하게 하는 어른, 사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어른을 사회는 요구하고 있다. 아이들의 말 잘 듣는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 잘못할 때는 잘못한다고 당당하게 가르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할 것이다.
(裵泰永/경희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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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회에 어른이 없다.
2003-03-25
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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