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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된 책 일부를 읽고 지나치려다 문득 文松의 아들 박주현 중위가 생각나 여기에다 퍼 옮기고 몇 문장을 더함.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5명과 일본학자7명 그리고 그 외 일본사관학교 (육사.해사) 장교 및 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된 책. 참고로 이 책의 발간을 주관한 중국의 쟝웨이링 교수는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 즉 동북공정을 맡는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 이었는데, 충무공 이순신을 연구하고 나서 1995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동북공정 작업에서 스스로 물러 났다. "역사학자란 후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역사학자란 두 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 가지는 숨기는 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 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 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 보다 역사 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 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이순신)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 책 중 두세 문단을 아래에 옮겨보는데 나는 솔직히 이 글을 읽고 그간 학창 때 읽은 충무공전서, 난중일기, 그리고 몇 년 전 읽은 칼의 노래 등보다 훨씬 더 큰 감명을 받았다. 1.明의 사신이 본 이순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장군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다.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 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 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한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 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의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 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 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 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 사람은 조선 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영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그 때 그 당시 충무공의 위치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는 우선 부하를 시켜 그 소년을 데려오라 했을 것이다. “날도 추우니 오늘은 걔를 여기서 가르쳐야겠다.”하고…… 그리고는 다른 부하를 시켜 “어이, 거기 어제 먹다 남은 막걸리 없나? 어한을 달래려면 한 잔 해야… 그래야 강의 빨도 잘 받고……” 아니면 ‘오늘은 날씨도 험악하니 하루 쉬자’생각하고 일찌감치 드러눕거나…… 그러나 충무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첫째, 엄동 설한 매서운 날씨에 손수 감옥으로 갔다. 그는 아마 스스로에게 약속했을 것이다. ‘저 아이에게 명심보감 한 권은 떼도록 하자’ 그리고 그걸 지키기 위해 칼같은 추위를 마다 않고 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가 대단히 어렵다. “담배를 끊자, 술을 주 2회만 마시자, 아침마다 걷자, ‘등등…… 왜? 자기가 자기에게 한 약속은 어겨도 누가 appeal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무공은 달랐다. 둘째, 그가 추운 날 아이를 데려오게 하지 않고 손수 추위를 무릅쓰고 가서 거기서 열악한(조선시대 감옥은 지금 감옥과 달리 난방도 안 되고, 빈대, 벼룩, 이 등 해충이 바글바글했다) 옥에서 벌벌 떨며 명심보감 강의를 했다. 옥리(獄吏)는 끝발 부서다. 요즘 형무소 간수도 마찬가지….. 담배 한 보루 주고 면회시간 좀 연장하거나, 영치금 좀 떼서 편케 하거나…. 이순신은 이를 알고 옥리에게 삼도수군통제사 명이니 죄수를 옥외로 잠시 불러내는 편의를 봐 주는 편법을 근절시키고 싶어 스스로 불편을 무릅쓰고 굳이 옥에 가서 명심보감 강의를 한 것이다. 이를테면 훌륭한 일을 한다는 미명 하에 공직기강을 해이케 하는 편법을 쓰는 방법을 피한 것이다. 셋째, 공무시간이 지나면 공무원은 쉬는 게 당연하고, 더욱 전쟁 중이라 사적인 용도로 쓸 시간은 지극히 적었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당연히 ‘피곤하니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할 그 시간을 쪼개어 나라 사람도 아닌 적군의 미성년 병사에게 가르침을 주는 데 할애하였다. 어찌 聖雄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이순신 전기를 읽을 때 노량해전 때 이제 졌다고 간주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 병사들을 굳이 ‘원수를 갚겠노라’고 도망가는 길을 막아 바다 고기 밥을 만들 필요가 있었는가? 이순신은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분풀이가 인생의 존재목적인 인물이 아닌 것인가 오해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대목을 읽고 충무공의 인격적 폭이 얼마나 큰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2. 일본장수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적이 있다는데, 일본에서는 명장 중의 명장으로 알려진 장수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장군 탄생 때 온다는 것.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을 알게된 건 한산도 대첩 때 인데, 와키자카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고 ,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한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일거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 일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 할수 있을 른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 탄생일 때 매번 온다는 것. 3. 진린이 본 이순신 명의 제독 진린은 노량해전 전, 명량대첩 후, 황제에게 이런 상소를 올렸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 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淸國)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휘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매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 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대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캐(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그리고 노량해전 뒤에는 다시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全文) <전하, 애통하여 붓을 들기가 어렵고 떨어지는 눈물로 먹을 갈아 올리나이다.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 지난 전투에서 전사하였나이다. 소장도 순신과 함께 전장에 나섰던 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노량의 바다를 덮어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하려 흉폭한 칼을 앞세우고 도전하여 왔나이다. 이에 순신이 자신이 대장 됨을 잊고 용감히 나가 싸우매 도적들의 사나운 칼을 두려워함이 없었나이다. 마침내 수백 척의 적함들을 격침하고 수만의 적들이 고기밥이 되었으나 저 간악한 고니시는 싸움이 치열한 틈을 타 제 나라로 도망쳤으니 이처럼 비분한 일이 없다 할 것이나,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 동틀 무렵하여 어지러운 전투 중에 패잔병이 허투루 쏜 총알에 맞으니 이런 비통한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비보를 듣고 급히 순신을 소장의 배에 옮겨 독의를 다그치며 순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어찌 애통하다 아니할 것이겠습니까? 마침내 순신이 그 숨을 거두니 이를 지켜본 소장과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애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순신이 이르기를 ‘싸움이 끝나기까지는 나의 죽음을 아군에 이르지 말라’ 하였다는 소자의 말을 듣고 짐짓 이를 감추어 큰 승리를 거두기까지 적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소장은 이미 지난 순천전투에서 순신이 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머나먼 낯선 바다에서 도적들의 횟감이 됐을 것입니다. 소장이 약관의 나이에 임관하여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았으나 천국에서도 소방에서도 순신과 같은 충신을 보지 못하였고 순신과 같은 맹장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마침내 순신이 아니었다면 소장의 목숨도 온전치 못하였을 것 입니다. 그러나, 순신은 소장의 목숨을 건져주었으나 소장은 순신이 도적들의 흉탄에 쓰러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이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일찌기 소장이 순신의 용맹하고 충성됨을 장계하매 천자께서도 이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탐내시어 마침내 수사 제독을 제수하셨으나 이제 순신을 잃으니 이를 어찌 전하의 애통함으로 그친다 하겠습니까? 일찌기 천자께오서 왜국의 도적들이 전하의 나라를 침노하여 마침내 상국을 향하여 그 창 끝을 돌렸기로 진노하시기를 지옥의 불길처럼 하시고 천군을 내려 도적들을 소탕하려 하셨으나 이에 도적들이 간교한 꾀를 부려 저희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물러나는 듯 하다가 다시 천자를 능멸하고 재차 도전해오니, 이에 천자께서 소장을 불러 이르시기를 내가 마침내 저 도적들을 내 위엄 앞에 쓸어버릴 것이니 너는 내 명을 받으라 하시기로 소장이 하늘의 뜻을 받잡고 남도에 이르러 순신과 대면하였나이다. 그러나, 그의 지략은 하늘이 내렸으며 그의 용맹은 자룡이 두려워할 만 하였나이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소장도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순신을 스승으로 여겼나이다. 선천에 이미 이와 같은 장수가 없었으니 감히 비교하자면 남송의 악비가 소방에 환생한듯 하였나이다. 소장뿐만 아니라 제가 휘하에 거느린 모든 부장과 장교들,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병졸에 이르기까지 순신을 존경하고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 어찌 전하의 홍복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순신이 고인이 되었으니 애통한 마음 감출 수가 없습니다. 순신을 잃고 전하의 어안을 어찌 볼 것이며 또한 상국으로 돌아가 천자의 용안을 어찌 보겠나이까? "그대는 순신과 함께 전장에 나가더니 어찌 그대는 살아 돌아왔으나 순신은 어디있는가?" 하시면 소장은 무엇이라 천자 앞에 말할 것입니까?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고 무릎이 떨려 일어설 수가 없나이다. 이제 소장이 순신을 잃으매 이 참담함이 마치 현덕이 공명을 잃음 같고 어룡이 여의주를 잃음과 같사옵니다. 이에 삼가 전하께 아뢰오니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 치열한 전투 끝에 300 척이 넘는 적함을 깨버리고 3만이 넘는 도적들을 어룡의 밥으로 주었으나 마침내 흉적의 탄환에 목숨을 잃으니, 하늘이 분하여 울고 산천초목이 애통하여 떨었나이다. 마침내 소장이 순신의 몸을 염하여 천자께서 내리신 비단으로 덮어 통제영에 이르니 백성 중에 놀라 까무러치지 않는 자가 없고 엎어져 울부짖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처럼 놀랍고 슬픈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들의 모습이 마치 전란 중에 부모를 도적의 칼에 잃고 길바닥에 나앉아 우는 어린 아이들과 같았으니 소장의 장졸 중에도 눈물을 감출 수 있는 자가 없었나이다. 실로 애통하고 애통하며 애통하다 아니할 수 없었나이다. 소장이 감히 전하께 주청하오니 7 년에 걸친 참담 한 전란 중에 섬나라의 도적들이 그 이름만 듣고도 떤 것은 오직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었으니 이에 그의 공을 높이시어 그를 뒤늦게나마 승상으로 삼으시고 순신의 죽음으로 애통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국상을 허락하시기를 비나이다. 전하께옵서 이같이 하시면 이 나라의 백성으로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답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옵니다. 다시금 북받치는 애통함에 붓을 들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일찍이 순신이 소장의 목숨을 구하였으나 소장은 죽음이 순신을 데려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나이다. 전하, 소장을 용서하시옵소서. 4. 장웨이링 교수가 학생들에게 한 강의(발췌) <나는 청나라 말기의 상황을 설명하고, 청과 열강과의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중 단 한명 다시 태어나 청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 였다. 항우.제갈공명.손자.관우….. 나는 잠시 창 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 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 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순신에 대해 설명했다 (중략) 어느 한 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 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 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 건 아편 탓도 있고 황제 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 장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손을 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중국에는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 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수 있었다. (중략)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 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을 것이다.' 라는 결과를 말해 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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