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얼핏 들으면 마치 나사로는 죽은 뒤에 그의 영혼이
천국에 갔고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영혼불멸설에
따른 천국과 지옥의 교리가 확실한 성경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나 일어날 수도 있는 실제적인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다만 예수께서 청중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주 사용하셨던 하나의 비유(Parable)에 불과하다.
비유는 그리스어 파라볼레(Parabole)에서 나온 말로 원래 한 물건을 다른 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나란히 놓고 본다는 의미로서 비교, 예증(Illustration), 우화
(Allegory)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근본적으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인
직유(Simile)와 은유(Metaphor)를 사용하는 수사학적 표현방법의 하나이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사용하여 진리를 가르친 경우로는
겨자씨의 비유(마태 13: 31 - 32), (마가 4: 30 - 32), (누가 13: 18 - 19)
혼인잔치 (마태 22: 1 - 14), (누가 14: 7 - 14)
열처녀 (마태 25: 1 - 13)
달란트 (누가 19: 12 - 27), (마가 25: 14 - 30)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 10: 25 - 37)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마태 15: 14), (누가 6: 39)
씨뿌리는 사람 (마태 13: 3 - 9), (누가 8: 5 - 8), (마가 4: 3 - 9)
탕자 (누가 15: 11 - 32) 등 그 예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예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이유는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당시의 랍비들의 교훈이나 유전 또는 헛된 철학에 얽매어
그릇된 편견을 가진 사람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헤롯당원, 관원 등 예수를 반대하고 정죄할 어떤 죄목과 구실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는 간단
명료한 계시적 효과가 있었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은폐적 효과가 있었다.
예수의 비유는 매일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기초로 청중들에게 친숙한 것들과
당시로서는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었으므로 청중들의 흥미와 주의를
끌 수 있었고 각자의 탐구심을 일깨어주었으며 그러한 각성을 통하여 새겨진
진리는 청중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가 있었지만 마음이 완악하여
진리에 귀를 닫고 있는 자들을 견책할 때에는 그들이 쳐놓은 올무를 피함과
동시에 그들의 편견을 자극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오류가 드러나게 하셨다.
특히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처럼
영혼불멸과 부활을 함께 신봉하였으므로 그들과의 논쟁은 무익한 것이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재물에 대한 탐욕 그리고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 즉 세속적인 명예욕과 허영심 등을 책망하는 가운데 그들이
하층 계급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성경지식과 영적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고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한 심판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됨으로써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천명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실제로 천국에 있을 수는
없으며 아브라함의 경우 장차 의인의 부활로서 일으킴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9 - 34절에서 당시 이미 죽은지 1,000년 이상이나 되는
다윗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무덤속에 있다고
했으며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이 사람들이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라고 함으로써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도 아직 천국에 들어가는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누가복음 14장 14절에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고 하였고
마태복음 16장 27절에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의 부활 여부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끝날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안에 있다는 것은 나사로도 부활의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사로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온갖 어려움 속에
살았던 천민으로 병든 거지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자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나사로는 당시 영적으로 육적으로 압제와 가난에 허덕이는 암 하레츠- 즉
'땅의 사람들'로서 장차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자들을 상징하였다.
반면에 부자가 들어간 하데스는 원래 그가 묻혔던 보통 무덤이었는데 그곳이
마치 지옥의 불못처럼 묘사된 것은 그가 이미 영원한 멸망의 상징인 게헨나로
옮겨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20장 14절에 의하면 "사망과 음부
(하데스)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하였으니 여기서
불못은 영원한 멸망을 상징하였던 게헨나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부자는 1세기 당시 부와 권력과 영적 특권을 누렸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 및 특권 상류층 모두를 상징하는
것이며 그들이 병들고 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이웃으로서 적절하게
돌보아야 할 모세와 선지자들이 제정한 율법의 정신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을
위하는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 완악한 심령이
굳어버린 사람들로서 마침내 멸망당해 마땅한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부활의 구원과 영원한 멸망- 이 극단적이며 대조적인 두 상황에 대한 비유적인
교훈이 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부자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
즉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만큼 돌이킬 수 없는 변화된 결과에 따라 처절하게도
후회막급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을 주다"라는 Torment- 영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어떤 장소나 상황에 가두다"라는 뜻으로 감옥의 간수를
Tormentor- 라고 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다.
성경에는 부활이나 생명에 관한 희망이 전혀 없는 자들을 영원한 멸망 즉
불못에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한다. (데살 후 1: 8 - 9)
유다서 7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여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는데 소돔성이 지금까지 실제로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돔성은 이 땅에서 사라졌고 철저하게 멸망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아 17장 27절에서도 "예루살렘이 꺼지지 않을 불로 삼킴을
당할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그 불이 태우는 대상들이 완전히 재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 탄다는 것이지 그 불이 실제로 꺼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불이란 것은 소멸을 의미하고 불못 속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요한 계시록 20장 10절에서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고 했지만
세세토록 즉 영원히 (forever and ever)라는 표현도 어떤 사건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의 기간으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그 기간이 더는 존속할
필요가 없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5장 6절에도 당시의
노예들에 대해 "송곳으로 귀를 뚫고 그가 영원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고
되어 있지만 노예가 영원토록 주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다 바쳐
죽을 때까지 주인을 섬겨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 (They will be tormented day and night forever and ever)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것들이 다시는 살아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그리고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상황에 갇히게 됨으로써
그런 결과를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또한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문자적으로 지옥불의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가르침이 없으며 오히려 대부분의 악인들도
의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부활할 희망이 있다고 알려주며
그때 부활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29절에서 예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신 후에 33절에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그들을 질타하셨는데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는 게헨나(Gehenna)로서 그곳이 어떠한
곳이었는지는 필자가 이미 설명한 바가 있으니 생략하고 성경 번역에서
이 단어를 전부 지옥(Hell)으로 번역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그릇되게
가르치는 아주 위험하고 잘못된 번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흠정역 번역본으로 알려진 킹 제임스 성경은 인류의 보통 무덤이었던
히브리어 세올(Sheol)을 지옥으로 31회, 무덤으로 31회, 구덩이로 3회
그리고 동일한 의미인 그리스어 하데스(Hades)를 10회나 지옥으로
번역하였고 가톨릭 두에이역 성경은 세올(Sheol)을 지옥으로 64회나,
구덩이로 1회, 그리고 영어개역본에서는 세올(Sheol)을 지옥으로 14회,
최근의 미국 표준역에서는 세올(Sheol)을 65군데 전부 세올(Sheol)로
그대로 번역하였다. 그리스어 하데스(Hades) 또한 하데스(Hades)로...
그러나 우리나라의 한글 개역판을 포함하여 위의 모든 성경 번역본들이
한결같이 게헨나(Gehenna)는 전부 지옥으로 번역하였는데 이것 역시
원어의 음역 그대로 게헨나(Gehenna)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게헨나(Gehenna)라는 곳이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영원한 고초의
장소인 지옥과는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다르며 예레미아 7장 31절을 보면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이는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라고
하나님이 자녀를 불에 태우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하시며 심한 혐오감을
나타내신 것을 볼 때 지옥의 개념은 성경에서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오늘날 지옥이란 단어에 부여된 의미는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과
밀턴의 실락원(Paradise Lost)에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상 불타는 고초의
장소인 지옥의 사상은 단테나 밀턴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그롤리에
일반 백과사전(Grolier Universal Encyclopedia, 1971년, 9권, 205면)은 지옥
항목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힌두교인과 불교인들은 지옥을 영적 정화와 최종
회복의 장소로 여긴다. 이슬람 전승은 지옥을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여긴다.”
사후에 영혼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상은 바빌론과 이집트의 고대 민족들의 종교
가르침 가운데서 볼 수 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신앙은 지하의 세계를
공포로 가득 찬 장소로서 힘이 대단히 세고 포악한 신들과 악귀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묘사하였다. —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종교 (The Religion of
Babylonia and Assyria), 모리스 재스트로 2세, 1898년, 581면; 사자(死者)의
서(書) (The Book of the Dead), E. 월리스 버지의 서문, 1960년 발행 참조)
따라서 영원한 멸망의 상징적인 장소인 게헨나(Gehenna)가 아닌 영원한
고초의 장소로 인식되는 지옥(Hell)이란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고대 바벨론의 거짓종교와 이교풍습의 근간이 되었던 영혼불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명백한 부활의 종교인 기독교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모순적인 개념이며 이를 전면적으로 배격해야 함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끝으로 현대의 대표적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20 - 1999)의
결론적인 말을 인용하면서 필자의 성경 이야기 9 편을 모두 마치기로 한다.
죽음을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했던 소크라테스나 죽음을 환희에 찬 영혼의
해방으로 받아들인 칼빈의 사상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은 본질적으로 불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서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이,
불멸의 것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부터 불멸이라는 사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이
사후에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적을
통해서 뿐이다. 영혼불멸사상과 부활의 신앙은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가
없다. 서로 상충되는 교리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에
기독교는 현재 엄청난 모순과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죽는 즉시 영혼이
천국이건 지옥이건 모두 가버리고 나면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때인
예수의 재림은 무슨 소용이 있고 그때 부활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Oscar Cullmann, 영혼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p.12 및
기독교 신학사전 p.379 참조 )
봉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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