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7년 3월 14일에 본인이 여기 동기홈피 글마당에 올렸던 것인데 요즘
저의 성경 이야기에서 못다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다시 게재하오니 참조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들여다보니 너무 두서가 없고
졸필이지만 대충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네요.
나의 종교에 대하여
감히 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나같은 필부(匹夫)에게는 분수에도
맞지 않는 일이고 되도록 언급조차 삼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바로 이 종교문제 때문에 여러가지 예기치않은 갈등이
야기되며 온종일 마음의 평정심을 잃고 심란한 기분에 휩쌓일 때가 종종
있어 나름대로 간략하게 나의 신앙고백겸 교통정리를 해두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고 나의 친구들도 이것을 미리 숙지하여
둠으로써 각자 신앙과 사상이 다르더라도 서로의 생각과 입장을 쉽게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얼마 전에 어떤 동기가 내게 편지를 보내어 내가 글마당에 올렸던
"아름다운 세상" 이란 글을 읽어보니 어쩐지 성경말씀이 느껴진다고 하면서
"박사장도 크리스천이요?" 하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12살 먹은 크리스천이며 어느 교회의 집사라고 말해 주었다.
아마도 나도 같은 종교임이 분명하다고 믿었던 까닭에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엄청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는 비례(非禮)를 무릅쓰고라도
우선 반가운 마음부터 묻어나는 노골적인 질문을 선택한 것이 과연
우리 동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 일이 있고 난 며칠 뒤에 또 다른 동기가 보낸 편지에서는
내 종교가 무엇인지 몹시 궁굼하다고 한 다음, 일단 종교를 떠나서
범인(凡人)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108 번뇌를 해소하는 의미에서
나에게 108 배(拜)를 권해 본다면서 스님이 하나하나 독경을 외면
따라서 부처님께 절(拜)을 올릴 수 있도록 자상하게 짜여진 안내문을
동영상과 함께 첨부해서 보내 주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뒷 편지에 대한 얘기부터 한다면,
나는 답장에서 이르기를 먼저 나를 같은 동기로서 그토록 생각해서
좋은 제안을 보내준 친절에 백팔 배 감사하며 그런 의미에서 동기가
권해 준 대로 108 배를 두 번이나 시행해 보았노라고 말해 주었다.
다만 시간관계상 스님의 독경과는 관계없이 혼자서 나름대로 두서없이
이것저것 좋은 생각들을 떠올리며 돗자리 위에서 부지런히 절을 했더니
운동도 되고 정신도 한결 맑아져서 정말 유익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108 번뇌는 하나하나 따로 노트에 적어가며 그 내용을 살펴보니
참으로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 있었고 그 뜻과 정신이 깊고도 넓어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배울 점이 있었다고 했으며 나름대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했던 노장(老莊)사상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먼젓번 동기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는,
"그렇소. 나도 크리스천임에는 분명하오만 교회는 다니지 않고 있소"
라고 답변해 주었다. 아마도 그 친구는 다소 실망을 했을지도 모르겠고
교회도 안 다니면서 어찌 당당하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사실 나는 결혼 전에는 아무런 종교도 갖지 않았고 약간 불교 성향의
공허한 허무주의 사상에 끌리고 있었다고 보면 거의 비슷할 것 같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장가를 들고부터 결혼조건부로 내건
교회 잘 다니기를 수락하면서 제법 착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새벽기도와 교회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낼 만큼 한때
큰 사업도 하게 되었고 그때 내가 승승장구하며 경영하던 안양의 피혁제조
공장에 당시는 초라하게만 보였던 지금의 이랜드그룹의 박성수 회장께서
찾아와 시흥에 있는 자기 공장 월요예배에도 참석해달라고 요청할만큼
내 얄팍한 신앙을 온 사방에 나발불고 자랑하고 다닌 시절도 있었다.
그랬다가 갑자기 무슨 마귀바람이 불었던지 졸지에 회사를 말아 먹고
과테말라로 이민을 가서부터 내 기독교 신앙이 위기를 맞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하기만 한 이민생할 가운데서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개척교회를 세우고 한국에서 담임목사님을 모셔오는 등 초창기의 몇몇
교우들과는 상당히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함께 누리면서 자부심과 기쁨이
대단했었다가 500명 남짓하던 교민이 불과 2-3년 사이에 15,000명으로
늘어나면서 도저히 친분을 나눌 수 없는 아주 고약하고 못된 불한당 같은
교회성원들이 생겨났고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수많은 교회들간의
영역다툼과 시기 모략 밥그릇 싸움에 정나미가 떨어져 어느 한순간부터
내 마음이 슬픔과 분노 그리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회의감에 빠졌고
결국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이상한 왕따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후 나는 과테말라가 싫어져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한국에서도
나의 신앙생활이 방황의 연장선상에서 혼자서 깊은 고민만 하다가 7 년후에
이곳 과테말라로 되돌아왔는데 그동안 약 20개의 크고 작은 교회들이 세워
졌으며 처음의 개척교회는 가장 큰 초대형교회로 발전되어 시내 한복판에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지었으며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초창기 멤버들이 나를
찾아와 우리 집사람의 찬송가 반주만큼 은혜로운 반주는 그 후로 들어보지를
못했다면서 다시 교회로 나오라고 간곡히 권유하였지만 한번 오지게 삐져버린
마음이 결코 돌아서지 않는 것은 이제는 단순히 교회성원만의 문제가 아니고
교회를 나와 바깥에서 교회를 보니 그전에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게 된 바,
나는 이제 다시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목사님에게 모진 말만 내뱉게
되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사람도 내 생각과 결정에는 무조건 따르겠노라고
어차피 부부가 일심동체이니 죽어도 같이 살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하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렸을 적 친숙했던 불교에 남다른 호감을 갖고 있었고
한때 내 주위가 참으로 삭막하고 황량하게만 느껴졌던 20대 전후반 시절,
내 삶이 무척 고달프고 괴로웠으며 감당하기 힘들 만큼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 불현듯 머리깎고 중이 될려고 마음먹었다면 내 친구들은
설마 그랬을 리가...아마도 농담이겠지 하고 피식 웃을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서울대 낙방하자마자 우리 집이 망해 갖고 돈 한 푼 없이
해인사 약수암을 찾아가 8달이나 신세지며 서러운 눈칫밥 먹을 때의 일인데
처음 중이 되겠다고 눈물 콧물 흘리며 삭발하던 때부터 새벽공양 예불 때마다
다부지게 먹었던 그 마음도 주지스님(감원스님)이 들려주는 몇 마디의 불경
지식이 도무지 뭔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을 뿐더러 도대체 석가모니 부처가
결국은 사람인지 신(神)인지...어찌 불교의 불(佛) 짜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승려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자꾸 회의감이 들어 그만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해 가을단풍이 몹시도 아름다울 때 서울에서 내 형님의 대구중학교
친구분이 가족과 함께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나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나는 그 집 고교생 가정교사로 발탁되어 한 많은 해인사 가야산을
떠나게 되었다. 단 두 달 재수하여 운 좋게 연대를 갔고 그 후 또 나의 파란많은
대학시절과 이집 저집 가정교사로 전전하며 힘겨웠던 서울생활로 이어졌다.
그동안 틈틈히 불교관련 서적들을 읽어보았는데 그것은 무슨 공부라기보다
그저 가끔 해인사 약수암의 자애로웠던 감원스님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어느 기독교인이 쓴 "사이비 이단연구"라는 일련의 저술에서
"불교의 정체"라는 으스스한 제목으로 불교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을 읽어보니
어떻게 나만큼도 불교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자가 어찌 함부로 나서서 경박한
입을 놀리는가 싶어 은근히 화가 났으며 이렇게 철없이 무식하게 남의 종교를
공격하는 기독교야 말로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한때 1980년대 한국 불교 조계종의 종정을 지내셨으며 나도 여러차례
가본 적이 있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20년간 문 밖을 나선 적이 없었고 16년간
쌀가루와 솔잎만 드셨으며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의 험난한 수도정진을
하시다가 1993년에 입적하신 성철스님이 남긴 법어(法語)에 관한 것이었다.
1986년 부처님 오신날에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만물은 다 한 뿌리요 한 몸이며
부처님이 일체시니 일체가 다 부처님이요.
모두가 평등하고 낱낱이 장엄합니다.
1987년 부처님 오신날에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읍니다.
1988년 부처님 오신날에
부처님의 처소는 지옥입니다.
온갖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 받고 그들을
안락한 곳으로 옮겨가도록 돕기 위해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1993년 성철스님의 마지막 열반송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가 하늘에 가득차고
수미산 보다 더 하니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가 되는지라.
이 장엄하고 심오한 비유와 은유의 깊고 광대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성철스님의 법어(法語)를 두고 그 기독교인은 경박하게도 이제 불교의
정체가 낱낱이 드러났다고 저혼자 신이나서 호언장담하면서 불교란
재소자들과 호스티스를 부처님으로 떠받드는 희한한 종교에 불과하며
사탄이 곧 부처요 부처와 사탄이 하나라고 하니 정신병자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불교를 믿겠느냐고 하면서 불교인들을 완전 정신병자 취급을 하고
말았으니...또한 더 기가 차고 맥이 찬 것은,
자기가 아는 목사가 기도중 입신(入神)하여 지옥에 6번 갔다 왔는데
부처가 그곳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와서 이미 자기에게 알려
주었지만 이 사실을 공표하면 불교신자들이 얼마나 펄펄 뛰겠는가 싶어
자제하고 가급적 말을 삼가하고 있었는데 한국 불교계에서 가장 불심이
강한 성철(스님이라고도 절대 말하지 않음)이 제 스스로 그것을 밝히고
이실직고하고 말았으니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지옥에 있는 부처를 믿다가 나중에는 믿는 자들도 모두
단체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종교임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불교의 49재, 영산재, 예수재, 열반, 사리, 부적, 염불 등은
모두 신도들을 속여서 재물을 갈취하려는 해괴망측한 짓거리로서 다
사기극에 불과하다고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또 얼마 전 우연히 인터넷 어느 코너에서 부산 경남지역 기독교 부흥운동
연합예배 동영상을 보다가 예배인도자가 나와서 하느님께 통성기도하는
가운데 그 지역에 분포된 불교사찰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이 사찰들이 일시에 다 무너지게 하옵소서" 라고 외치자
모든 예배참석자들이 일제히 따라서 외쳐대는데 모골이 송송연하였다.
아무리 전도도 좋고, 부흥도 좋고, 기독교 확장도 좋지만 이런 식의
섬뜩한 표현들은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중에는 "모든 불교인들을 다 죽여 주옵소서." 하지나 않을런지...
이런 광경을 볼 때 또한 이런 의미를 뒤집어 놓고 볼 때
성철스님의 그 법어는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그 분의 사랑과 자비가 감옥에 있는 범죄자와 사창굴에 있는 창녀에게도
닿았으며 원수중의 원수인 사탄 뿐만이 아니고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에게까지 미쳤으니... 그분의 향기로운 말씀에 내 가슴이
다 훈훈하고 그분의 고귀한 정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 같구만...
내가 알기로 효봉스님도 돌아가실 때 여태껏 자기가 살아서 한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하셨다. 성철스님도 속이는 자요, 효봉스님도 거짓말장이니
불교인들은 영락없는 사깃꾼들이라는 주장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어리석고 죄 많은 자는 짐짓 의로운체하며 자기 죄가 없다 하고 감추기에
급급한데 그나마 죄 없고 깨끗하며 현명한 자는 오히려 자기 죄가 많다고
겸손해 하는구나. 아.. 이것 또한 엄연한 세상이치 중 하나가 아니던가?
나는 그래도 분명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아는 기독교는 너무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철스님의 법어 내용과 비슷한 것이 성경에도
그대로 있다는 점을 아까 언급한 그 경솔한 기독교인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수많은 범법자들 및 창녀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회개하도록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온갖 장애인, 병자들, 악귀 들린자들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부활하셨을 때
지옥으로 가셔서 그곳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까지 전파하셨고(베전 3:19)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실 사탄은 원래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천사였으며 그것도 특별한 은총과 사명을 부여받은 기름부음
(왕과 제사장의 의미)받은 선택된 그룹천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탄(반항자의 의미)이 스스로 교만해져서 자기도 하느님처럼
숭배를 받고 싶은 욕심이 생겨 마귀(중상자의 의미)가 되어 거짓말로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에게 하느님을 중상모략하여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자기를 숭배하도록 그릇 인도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쳤건만 하느님은 사탄을 즉결처분하지 않으시고
그가 한 거짓말의 결과와 그것을 따랐던 인류의 고난과 불행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인류가 결국 사탄을 배척하고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전 과정을 똑똑히 확인할 때까지 그를
살려두시기로 하신 것은 원수 사탄에게마저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신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나는 나의 기독교 신앙고백과 더불어 이웃사랑과 관련하여 몇 마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여호와라는 고유한 이름을 가지신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그분이 세상인류에게 왕으로 보내신 자 곧 그분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예수께서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죄없는 죽음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대속의 과업을 완수하시고 다시 부활되셨으며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시어 하느님과 가까이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게 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고
그분의 계명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 바,
첫째는 위로 하느님을 공경하고
둘째는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이웃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만 이웃인가?
이웃은 같은 동족일 경우만 이웃인가?
이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어떤 유대인이 강도에게 털리고 매맞아 쓰러져 다 죽게 되었을 때
지나가던 동족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본체만체 그냥 가버렸지만
유대인이 평소 미워하고 천대하며 오랫동안 원수처럼 여겨왔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해주었다는 얘기는 이미 다 아는 얘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그 사마리아인이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라고
말씀하신 점이다. 이웃은 옆집에만 산다고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그 이웃을 위하여 내가 갖고있는 것을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웃이 무슨 종교를 가졌든, 어떤 사상을 가졌든, 이웃을 위할려면
먼저 내 것을 양보하고 이웃에게 겸손할 것이 요구되지 않겠는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방 생각을 깔아뭉갠다면 어떻게
좋은 이웃이 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여기서 또한 모든 종교인들에게 감히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자기 종교가 아무리 최선이고 오로지 최고의 진리라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다시 냉철하게 자기 것을 둘러보고 점검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참다운 신앙을 가지려면 지금까지 자기가 믿어온 것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동안 맹목적인 것이 없었는지 모든 것을 이성에 의해서 재검토 해봐야
한다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무교회주의자였던 톨스토이가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숲속에서 나무만 보면 결코 숲을 보지 못하고
산속에만 있으면 산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 누가 알 수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도 오로지 우리 자신의 이성적인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판단되어진 것이라면 우리의 그러한 지적능력이
얼마나 미미하고 제한적인 것인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더 잘 알 것이다.
누가 작은 미생물의 세계와 세포의 분자, 원자, 핵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보며 광활한 우주의 한 쪽 끝을 단 한 번이라도 갔다 올 수가 있겠는가?
누가 감히 무한히 작은 소리와 무한히 큰 소리를 들을 능력이 있으며,
빛은 어느정도 밝아야 보이며, 색은 어디까지가 분별이 되겠는가?
따라서 나는 진리는 반드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상대적으로 밖에 파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도 결코
어느 한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계속 꾸준히 탐구하며 증거에
대한 검증을 거듭하는 과정의 한시적인 조건부 자기확신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데 어느 신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이 그와 같이 미약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신(神)이 인간에게 보내는 메세지 혹은 계시를 인식하고 분별할
능력은 있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없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때만이 그제서야 비로소 신(神)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만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맹신(盲信) 혹은 광신(狂信)과는
차원이 다른 강한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한 말로서 어느 종교든 거기에 속한
신앙인의 자세로서는 응당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우리의
이성과 경험법칙상 그러한 주장이 종교마다 다양하게 구현되어 왔고 신(神)의
계시도 그 내용이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다면 결국 종교란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객관적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면서도
개별적인 특수한 자기 환경과 경험 그리고 주관적인 이성적 판단에 기초하여
내려질 수밖에 없는 선택적인 자기 확신의 문제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지?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신앙을 소중히 생각하고 끊임없이 구도(求道)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면 모롬지기 남의 신앙을 존중하고 자기 확신에 대해서는
겸허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1%라도 자기만 똑똑하고 자기만이
모든것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100%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광인(狂人)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독 기독교 각 종파마다 이단과 사이비 논쟁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분당과 파쟁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이단의 뚜렷한 징표라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다. 기독교 개신교 쪽에서는 하루에도 몇 개씩 새로운 교파가 생겨난다니
교리(敎理)와 교의(敎儀)에 관한 성경해석을 놓고 자기 생각과 주장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식의 비이성적인 아집과 교만으로 제발 더 이상의 교단과
교파를 만들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설사 또 그렇게 어거지로 만들어진
한심하고 어리석은 교파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이단 혹은 사이비로 규정하여
매몰차게 몰아붙이지도 말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세계의 한 모퉁이에 있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무슨 기독교,
무슨 예수교, 무슨 파, 무슨 파, 무슨 그리도 작은 좁쌀 같은 한국산 기독교의
종파들이 이미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경륜을 갖추고 수많은 신도를 두고
있는 세계적인 종교 혹은 종파들을 향하여 무슨 정체니 사기니 어쩌니
이단운운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이미 세계적인 종교로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 기독교만 하더라도
그 출발부터 의문의 여지없이 예수께서도 당시 이단의 괴수라고 불리웠고
그후로도 수많은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이단이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순교를
당했으며 다름아닌 같은 기독교 내부의 종교재판을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무고한 양심적인 종교개혁자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던가?
또한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던 크고 작은
수많은 종교전쟁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피를 흘렸던가?
그리고 과거 뿐만이 아니고 지금도 세계 각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전쟁과 침략, 압제와 약탈, 대량살상, 종족분쟁에 기독교가 어느 종교
못지않게 더 깊숙히 관련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즉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도대체 무슨 신앙을 가졌다는 것인가?
인도의 민족지도자이며 힌두교인이였던 모한다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것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비판을 정녕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며 어떤 이유로도 다른 사람을 해치고
다른 민족과 종교를 핍박하고 단죄하고 멸시해서는 아니 된다. 하물며 같은
기독교 내에서 이단과 사이비 그리고 거짓종파에 관해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반드시 정죄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며 우리 인간은 다만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또한 악을 미워하되 악인은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어 진실로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기본정신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한편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 및 교회구성과 내부조직의 결속과 관련하여
한국 개신교의 각 종파는 우선 내 종파가 1세기 당시 본연의 초기기독교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이어받은 세계적인 기독교종파로서 과연 손색이 없는지?
수 세기 동안 종교개혁의 그 수많은 곡절과 값진 희생으로 얻어진 기독교 개혁
신교의 역사성과 당위성의 순수한 맥을 잇고 있는 그 본류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래서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조직을 갖춘 기독교종파로서 유럽이나
미국등 다른 나라에서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종파들과 동일한 정체성과 상호
신뢰를 통한 신도들간의 동질적인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 오고 있는지?
단지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믿고 실천하는 내용들이 다르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이 분명히 긍정적인지 아닌지도 냉정히 점검해 봐야 한다.
따라서 한국개신교는 전체로서 무엇보다도 전 교회가 합심하여 현재로서는
정확한 통계조차 잡을 수 없는 그 수많은 교단과 교파를 모두 묶어 하나로
통합하는 전례없는 비상한 결의와 특단의 조처들을 통하여 한국 토속적인
잡다한 기독교분파를 지양하고 세계적인 단일 정통기독교로서 하루속히
새롭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도 한 분이시오, 예수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가르침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여야 하니...
과테말라에서
봉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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