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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 얼룩진 과거 제 1 화 “숭 시콘“은 집밖의 닭들이 구구 대는 소리보다 더 크게 목소리를 높여서 학생들에게 are 와 is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집 밑 공간에 간이로 만든 2부제 교실에서 과거 크메르 루지 동료들의 2세들을 위하여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세대보다는 더 나은 세대를 이끌어 가야 할 캄보디아의 젊은 세대들을 도울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싶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크메르 루지 시절에 도와주려고 했던 농부들의 생활을 지금 계몽하기도 한다. 학생들의 반 정도만 약간의 학비를 낼 수 있으므로 벼농사와 옥수수를 재배하여 생활비를 만들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젊고 꿈에 부풀었던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부패한 체제로부터 어떻게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연구도 “폴폿”, “이엥사리“등과 같이 하였었다. 또 한때는 “민주 캄푸치아”의 외무부 차관을 지내면서 크메르 루지 체제를 보고 싶어 하는 외국 고위 인사들의 초청을 주선하기도 했었다. 크메르 루지가 프놈펜을 함락하고 4년간의 폭력정치를 시작하던 때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당시 혁명의 근간(根幹)을 다듬었던 “숭 시콘”과 몇몇 사람들만이 크메르 루지의 과거를 떠올리는 유일한 사람들로 남아있다. “그 때는 당시의 문제들을 상대로 어떻게 무력 투쟁하느냐를 연구했지만 이제는 총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계급투쟁은 결국 국가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캄보디아의 문제들은 전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누가 설사 나를 때린다고 나도 상대를 때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 때 공산주의자였던 이 지식인은 이제 정치를 논하기보다는 옥수수 값과 금년 벼농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불어를 잊지 않기 위하여 이웃들과 또 “폴폿”의 두 번째 아내 “메아 손”과 다시 재혼을 한 “텝 쿤날” 등과 불어로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비록 1996년 대규모로 정부군에 투항을 한 “이엥사리”가 이끄는 민주 국가연합 운동(DNUM)의 대변인이었지만 이제 정치와는 영원히 손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그는 단순하고 조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내 양심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나라가 번성하고 사람들이 잘 살게 되어 사회적인 불균형이 없기를 바랍니다." 숭 시콘은 북서 변방의 이 외진 산골인 “말라이”에서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잡지나 신문을 읽고 또 라디오를 들으며 항상 국내 및 국제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또 캄보디아가 유엔과 같이 어떻게 크메르 루지를 재판할 것인가 하는 일을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는 과격적인 집단 농업 공산주의로 170만 명이 넘는 국민이 희생된, 캄보디아를 살리는 대신에 죽여 버렸던, 잔학하고 냉혹했던 크메르 루지 시대를 국민들과 또 세계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집단 학살을 하고 파괴를 저지른 “폴폿”을 말년에는 거의 모든 크메르 루지들이 그랬듯이 “숭 시콘”도 비난을 했다. 그리하여 그와 수만 명의 크메르 루지들은 한때 3호 동지로 불렸던 “이엥사리”를 따라 1996년에 대규모로 정부군에 투항을 했던 것이다. “폴폿은 누가 그를 거역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폴폿의 지도력에 있었습니다.“ “숭 시콘”은 1981-1982년 사이에 1호 동지 “폴폿”의 보좌관으로 있었다. 프놈펜의 외무부에 근무를 할 때 그는 지방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1977년 3월에 그가 스웨덴의 대사를 모시고 앙코르 왓 관광을 안내할 때였다고 한다. 앙코르 왓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탐방 근처에서 차가 고장이 났었는데 그 때 “숭 시콘“은 한 여자아이가 와서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니 프놈펜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바탐방이 쌀 생산의 제 1 지역이었으므로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1977년부터 시작된, 크메르 루지 고위층을 포함한 모든 크메르 루지들을 일단 배반자 내지는 간첩으로 간주하여 숙청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숭 시콘”도 매우 조심을 하여 일체 그러한 의심의 기색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때는 정말 악몽과 공포 속의 나날이었습니다. 크메르 루지의 고위 지도급 사람들도 나처럼 그 친척들이 갑자기 잡혀가서 처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재난은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조차 끔찍합니다.“ 1979년에 베트남군이 만약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도 언제 고문을 당하고 숙청되었을지 몰랐을 거라고 했다. 분명 그도 다른 많은 친구들과 같이 툴스랭(S-21) 취조실에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죽었을 것이라 했다. “나는 민주 캄푸치아의 위신을 손상시킨 사건이었던 영국인 학자 ”말콤 칼드웰“을 암살한 혐의를 받고 있었지요.” “말콤 칼드웰”은 크메르 루지 체제를 지지하는 극소수 서방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영국의 “아시아-아프리카 학교”의 교수였다. “칼드웰”은 두 명의 미국 기자들과 같이 초청을 받아서 캄보디아에 온 뒤 “폴폿”을 만나고 난 그날 밤에 숙소에서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었다. “세 명의 삼촌들도 숙청을 당했는데 모두 크메르 루지 소속이었지요.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1979년 1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공격하자 “숭 시콘”은 다른 몇몇 크메르 루지들과 같이 몰래 외무부 건물의 뒷문으로 빠져나가 사흘 낮 밤을 도주했다고 한다. “우리는 크메르 루지였으므로 마을에서는 몰매를 맞아 죽을 까봐 가지 않기로 했지요. 크메르 루지가 좋은 집단이었다면 사람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때로 한적한 곳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밥을 좀 달라고 하면 우리가 총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밥을 못 주겠다고 해요.“ “숭 시콘”은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단지 우선 시급한 것은 캄보디아에 이제 막 평화가 시작되었으므로 침착하고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모든 캄보디아인들이 재 화합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먼저 필요합니다. 고요함을 느끼는 것 같지만 끝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다시 시끄러워집니다. 우리는 좀 더 충분한 시간 동안 감정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그가 젊었을 때부터 있던 문제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바로 빈곤이며 극심한 빈부의 차이와 또 정부의 부패라고 했다. “현재의 정부는 크지는 않지만 모두 인정을 하고 수용을 해야 합니다. 캄보디아가 겪었던 것은 많은 정권들이 바뀌고 또 거쳐 갔지만 한결같이 고통의 연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정부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두 번째 아내에서 태어난 14살의 아들이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배우고 농부가 아닌 직업을 갖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 “로렌스 핔”은 두 아이를 데리고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로렌스 핔”에서 태어난 다른 한 아들은 베트남인을 숨겨주다가 죽었다. 그는 조만간 프랑스에 가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인제 크메르 루지는 없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뜻에 따라 어느 정당에도 가입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부터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 2 화 거의 매일 아침 “롱 노린”은 밭에서 딴 옥수수를 픽업 트럭에 가득 싣고 “말라이”시장에 갖다 팔았다. 그는 아내와 다섯 아이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장사가 잘 되고 있다고 했다. 씨앗 값은 그대로인데 옥수수 값이 올라가서 “롱 노린”은 신이 났다. 그는 또 마을 농협에서 고문으로 일하고 있으면서 농민들에게 공급과 수요의 원칙이나 다른 경제 기본 원리를 가르치며 농민들이 어떻게 농사를 짓고 또 장사를 할 수 있는가를 깨우쳐 주고 있었다. 이러한 지식은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지식이었다. 지금은 농부로 살고 있지만, 그가 석사 학위까지 받은, 또 3개 국어에 능통한 지식인 출신이라는 것은 지워 질 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는 마을 사람들의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결국 농부로 살아가는 나는 과거에 배운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어요. 그런 것이 크메르 루지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농업을 위한 노예에 지나지 않았으며 크메르 루지는 쌀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하였지요. 그러나 그것이 가장 큰 실패였습니다.“ 지금의 수상 훈센을 위시한 다른 많은 학생들과 같이 “롱 노린”도 미국을 업고 1970년 시아누크를 축출한 “론놀” 정권의 부패에 항거하여 크메르 루지에 가담을 했었다. 그리고 민주 캄푸치아 시절에는 외국 귀빈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진심으로 혁명 조직에 충성을 했지요. 그러나 조직은 나뿐 아니라 충성을 바친 모든 자들을 기만했습니다.“ 그는 지금에야 당시 크메르 루지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했던, 공상적인 농업의 천국으로 모든 사람들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계급이 없는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크메르 루지에 몸담고 있었던 때가 마치 꿈을 꾼 것 같다고 했다. “크메르 루지 통치 당시에는 많은 충신들이 있었지만 곧 대 숙청이 시작되었지요. 크메르 루지 정책의 많은 실책은 너무 갑자기 정권을 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5년간 론놀과 투쟁을 했는데 만약 10년이나 15년의 투쟁기간이 있었더라면 아마 정책 실패를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5년의 투쟁기간은 사실 매우 짧은 기간이었으며 정권을 잡고 난 후의 안정적인 정치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크메르 루지 정책의 기본 강령인 사회 평등, 계급 일소,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독립 등은 나쁜 정책이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크메르 루지의 가장 큰 문제는 살육이었습니다. 학살만 하지 않았더라면 크메르 루지가 나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들의 심판인 것입니다“. “숭 시콘“과 같이 ”롱 노린“도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현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민주 캄푸치아 시절 그는 프놈펜에서 집과 사무실만 다닐 수 있었다. 단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을 어렴풋이 알 수밖에 없었다. “체포를 했다는 방송은 많이 들었지만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요. 대 숙청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서서히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고 나는 CIA, 또는 KGB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폴폿의 곁을 떠나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1996년에 와서 “폴폿”이 허약해지자 그때서야 “롱 노린”은 20년을 몸담고 있던 크메르 루지의 통치자 곁을 떠날 용기가 생겼다. “우리는 ”폴폿“의 잘못을 알고 있었지만 공포감에서 감히 반기를 들 수 없었으며 ”폴폿”이 계속 건강하고 강력하게 통치를 했다면 아무도 이탈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도 지금 크메르 루지 지도자들의 재판에 협조를 하고 있지만 크메르 루지 통치 시절의 복잡한 내용을 조사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와 역사가들이 얘기한다. “사실적인 증거가 없는 재판은 정의가 아니고 그 반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의 비밀도 이제야 일반에 공개되고 있지 않습니까? 캄보디아 속담에 물통 속의 고기 한 마리가 썩으면 그 안의 모든 고기가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비록 그 안에 아직 싱싱한 고기가 있더라도 말입니다. 크메르 루지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그 당시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캄보디아는 많은 과격파 정부들이 통치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인제 캄보디아는 중용의 길을 택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수렁에서 더 이상 헤매지 말고 현실과 미래를 보며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과거만 가지고 따진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친구나 친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나보고 왜 그런 일이 있도록 내버려두었느냐고 비난 할 것이고 그 때마다 나는 자꾸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 3 화 친구들이 방콕에 나갈 때마다 “텝 쿤날”은 신문이나 잡지들을 사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라크 사태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한국이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밤에만 경운기 엔진에 붙은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쓸 수 있는 외진 밀림 속이었지만 “텝 쿤날”은 놀라울 정도로 국제 뉴스에 밝았다. 뉴스위크, 이코노미스트 등을 위시한 수많은 신문과 시사 잡지들이 그의 집에 쌓여 있었다. 평소에는 점잖고 조용한 그가 미국 “라이스” 국무장관의 정책이나 동 티모르 사건을 얘기할 때는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면서 힘이 들어갔다. “나는 적어도 지식인일세” 라고 말하는 그는 인제 예순 살이 되었고 1998년 9월에 “말라이”로 이사를 오면서 죽은 폴폿의 두 번째 아내였던 “메아 손”과 재혼을 했다. 당시 세 살된 폴폿의 딸 (폴폿의 유일한 자식)도 같이 싸 안았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가 않아”. 이 얘기는 매일 벼를 그의 방앗간으로 나르는 일을 말한다. 또 옥수수 밭의 일과 닭, 돼지를 치는 일을 말하고 있었다. 또 그가 프랑스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또 개화된 철학자들의 시대를 훤히 알고 있는데도 단순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 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조국이 아직도 세계 유수의 빈국이라는 사실은 그를 너무 슬프게 했다. 마을 주변의 길은 웅덩이투성이였고 국민 보건 시설은 아예 없는 것과 같아 많은 시골사람들이 병마와 싸워야 했다. 크메르 루지 창설 초기에 하급 당원으로 시작하여 1990년에는 지도급 고급 당원 자리까지 부상하였던 “텝 쿤날”은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고통 속에 버려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1998년에 정부군에 투항하면서 그는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했고 서민으로 조용히 살아가겠다고 했었다. 또 현실이 그 자신도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도 않았다. “철학자 룻쏘도 말년에 그랬듯이 나도 이제는 쉬고 싶어” “30년을 사회 정의를 위하여 싸워왔지만 결국 실패했어” “텝 쿤날”과 그의 새 아내는 동네 사람들에 비하면 잘 살고 있는 편이었다. 그들은 3대의 도요다 픽업 트럭을 소유하고 있었고 두 대의 중국제 대형 트랙터와 두 군데의 방앗간을 가지고 있었다. 집도 매우 커서 수십 명의 이웃들과 동네 아이들이 놀러 와도 조금도 불편하지가 않을 정도였다. “텝 쿤날”은 외부인이나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롱 노린”과 “숭 시콘”은 2000년 1월의 크메르 루지 재판에 관한 공개 토론회에 참가를 했지만 “텝 쿤날”은 가지 않았다. 그는 대중 속에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고 기자들이 아내와 인터뷰하는 것도 정중히 거절하였다. 이들은 1999년에 아이를 가졌다. 아내 “메아 손”은 또 전남편 “폴폿”의 유일한 혈육인 아직 미성년인 딸 하나를 데리고 있다. 그에게 과거는 너무 선명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폴폿”에게 충성을 하였으며 크메르 루지군 참모총장 “타목”이 배반을 하고 추격을 할 때 “폴폿“을 호위하여 태국 국경의 숲 속까지 피신하였다. 그러나 결국 “폴폿”, “키우삼판” 등과 같이 1997년 6월 15일 “타목”에게 잡히고 말았다. “나는 이념 때문에 ”폴폿“과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같이 있어야 세력을 흩트리지 않고 조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종말에는 그도 “폴폿”이 캄보디아에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1997년 7월 “안롱벵” 마을에서 “타목”이 주도했던, 다분히 외부 언론에 보이기 위한 쇼- 같았던 인민재판에서 폴폿을 비난하고 말았다. 그러나 “타목”은 170만 국민을 죽게 한 죄를 추궁한 것이 아니라 국방 장관을 지낸 “손센”과 그 가족을 죽인 혐의로 “폴폿”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였던 것이다. “텝 쿤날”은 가장 마지막에 정부군에 투항한 크메르 루지 고위층으로 그 때가 1998년 9월이었다. “우리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우리 생각에는 빈농들에게 권한을 주면 앞장서서 잘 할 것으로 또 발전할 것으로 믿었었는데 그것이 전혀 아니었어”. 그는 크메르 루지 지도층들을 재판에 회부한다는 말에 화를 내었고 국제 사회가 캄보디아의 흘러온 전체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왜 세계는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의 캄보디아만 갖고 떠드는 거야? 1960년대 시아누크 독재 때는 어땠고, 프랑스 식민통치 때는 말도 없고 또 월남 놈들 쳐들어 와있을 때는 한마디도 없어? 그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었다구“. 그는 1960년대에 국회의원을 지낸 “키우삼판”이 좋았고 또 부패한 시아누크 정권보다 크메르 루지가 더 대중들에게 어필하여서 크메르 루지에 가입했다고 한다. 인제 그의 머리도 반백이 되었지만 “텝 쿤날”은 “폴폿”, "눈 체아", “이엥사리”, “키우삼판” 등 노장 세대의 사람들보다는 20여 년 뒤의 젊은 세대이다. 죽은 폴폿을 제외하고 이 노장들은 모두 한때 크메르 루지의 가장 강력했던 거점인 파일린 시에 모여 살고 있다가 지금은 프놈펜 국제사법 재판소 특별 유치장에 구금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키우삼판은 나의 우상이었어. 시아누크 시절 그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는 정말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었지“. 다른 많은 옛날 크메르 루지 동료들이 파일린과 말라이를 다니고 있지만 그는 1998년 9월 말라이로 이사한 뒤부터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처음 크메르 루지에 가입할 때의 그 정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다시 정치계에 뛰어들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지금은 물이 너무 짜. 맹물을 더 퍼 넣어도 당분간 짜기는 마찬가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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