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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정善政은 2천 년이 지나도 유효하니 Ⅰ. 생면부지의 네 사람이 같은 방을 쓰는 숙소에서, 처음 인사를 튼 30대 후반의 강소성 사람 정씨鄭氏와 그와 비슷한 연배로 광동의 심천深圳에서 왔다는 손씨孫氏 그리고 중국 축구자랑으로 나에게 기선을 제압하려던 상해의 대학생과 하루 밤 만리장성을 쌓게 되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손씨는 침대에서 천 이불을 둘둘 감고 앉아 맥주를 병째 들고 한 모금씩 들이키면서 지금까지 자기의 여정을 신나게 이야기한다. 구채구와 황룡에 갔었던 이야기, 낙산대불을 거쳐 아미산에 올라간 이야기들을 제법 영웅담처럼 호기롭게 설명한다. 자신의 여정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가 보다. 나도 시간이 가능하다면 낙산과 아미산에 갈 요량이었기에 관심을 보이며 한 번씩 고개를 끄덕여주자 더욱 신명이 나서 그림으로 도면까지 그려가며 침을 튀긴다. 덕분에 나도 필요한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었다. 정씨는 날렵한 몸매를 가진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행을 무척이나 즐겨 운남 일대를 돌아보고 오는 길이라고 한다. 나도 작년 여름에 운남 일대를 돌아다녔기에 서로 이야기에 죽이 잘 맞는다. 그러자 상해의 대학생 녀석이 운남으로 갈 계획이라며 간간이 의문사를 쓰며 끼어든다. 정씨는 중국 어학이 전공인지 몰라도 나의 말에서 성조가 틀린 것은 자기가 시범을 보이며 따라하게 하면서 고쳐주려고 애를 쓴다. 내가 무안하여 “중국어는 성조가 어려워서 배우기가 힘이 든다.”고 했더니 자기들도 어렵다면서 격려까지 한다. 외국인 중늙은이가 서투나마 자기네 말을 하는 것이 흡족한가 보다. 한참을 정보도 교환하며 재미있게 어울렸다. 갑자기 사람 좋아 보이는 퉁퉁한 손씨의 코고는 소리가 대화를 가로막고 나선다. 이제 잠에 빠지면 내일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다시는 만날 기약이 없는 사람들, 다시 한 번 찬찬히 그들의 용모를 머릿속에 넣으며 잠을 청한다. 국적도 다른 사람들이 생판 처음 만나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뿔뿔이 헤어지는 이런 나그네 길이야말로 인생 그 자체가 아닐까? 새벽에 일어나니 정씨가 벌써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나도 이 방에 아직 이틀 더 예약이 되어 있지만 오늘은 이곳 여행사가 주관하는 1일여행에 참가하여 도강언都江堰과 청성산을 둘러보려고 이미 어제 예약을 해두었기에 급하게 나갈 준비를 하였다. 23일 일찍 티베트의 라싸 행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어 성도에서의 일정이 빡빡해져 손쉽게 갔다 올 수 있는 여행사의 단체여행을 예약한 것이다. 아침 7시 반쯤 숙소 앞에 버스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짐을 챙겨 보관시키는 등 바삐 준비를 하다 보니 식사할 틈도 없었다. 이미 버스 안에는 서양인 일가족을 비롯한 열댓 명의 중국인 여행자들이 앉아 있었다. 버스는 다시 두보초당 앞을 들러 댓 명을 더 태우더니 시내를 빠져나간다. 이른 아침 바쁘게 움직이는 성도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하나같이 활력이 넘쳤다. 현재 중국의 서부대개발로 가장 큰 특혜를 보고 있는 도시다웠다. 길은 사통팔달 잘 뻗어있었고 길 가에는 녹색공간과 꽃도 눈에 많이 띄어 싱그러웠다. 서풍가西風街 임시시장을 지날 때는 많은 사람이 북적되어 제법 서민적이고 소박한 삶의 활력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눈에 비친 간판은 하나 같이 오늘의 중국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태자太子우유’라는 상표가 크게 걸려있는 간판은 오늘날 중국의 한 자녀로 인한 소황제의 사회상을 보는 것 같았고, 한창 짓고 있는 아파트 이름에 거창하게도 ‘천합개선성天合凱旋城’이라 크게 선전하는 것은 그들의 과장성과 아울러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중히 여기는 전통적인 사상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서민적이고 소박한 맛이라곤 없어 한편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Ⅱ. 한 시간쯤 갔을까 버스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사천의 농촌 마을을 옆으로 끼고 달린다. 10여 년 전의 우리네 시골 풍정과도 너무나 흡사하여 마치 고향을 보는 듯 정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겨움도 잠시였다. 갑자기 차를 도로가의 한 제약회사 마당으로 집어넣더니 안내원이 잠깐 쉬고 간다면서 내리란다. 우리뿐 아니라 이런 버스가 몇 대나 더 있었다. 안내원을 따라 전망대처럼 생긴 곳으로 갔더니 최신스타일의 지붕이 양쪽으로 여러 개나 연이어 있었다. 한쪽 지붕들은 사슴우리였다. 그런데 이런 사슴들은 처음 봤다. 황갈색 몸에 하얀 반점이 마치 흰 꽃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매화사슴[梅花鹿]이라고 한단다. 모습도 반듯한 것이 폼도 늠름하였다. 단지 흠이라면 멋스런 뿔을 달고 있는 놈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민망하게끔 싹둑 잘려나가 품위가 덜하였다. 머리가 덜떨어진 나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렇다. 말로만 듣던 여행사의 상품 판매장 안내로구먼. 이놈들에 비하면 반대쪽은 비참했다. 반달곰들이 군데군데 쌓인 배설물 사이에서 온 털에 오물을 묻혀가지고 콘크리트 바닥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이놈들은 불쌍하게도 인간들의 욕심을 위해 자신의 쓸개즙을 빼주는 숭고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95년 여름, 백두산을 가며 들른 용정龍井의 한 곰 사육장이 떠올랐다. 그곳에선 아예 곰의 옆구리에 비닐 관을 박아 큰 눈을 껌벅거리며 맥없이 슬픈 듯 쳐다보는 곰 앞에서 한 사람이 신들린 듯 쓸개즙을 빼내고 있었다. 주변의 한국 관광객 중에는 그것을 바로 사려고 용을 쓰며 따라가 끝내 구하여서는 마치 전리품인 양 의기양양하게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의 잔혹성과 탐욕성이 새삼 놀랍고 부끄러웠다. 이곳은 그때의 그 곰들보다는 처우가 크게 개선되어 있었지만 역시 기분이 찜찜하여 바로 내려와 버렸다. 옆의 큰 건물 꼭대기에 ‘○○약업’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약은 곧 독과도 통한다더니 ‘○○독업’(?)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맞다. 인간이 너무나 악업을 많이 지어 결국 스스로에게 독으로 돌아오게 될 터이니까! 버스를 타서 보니까 서양인과 중국인뿐인 일행이라서인지 한 묶음 들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20여 분을 가자 도강언 시의 깨끗한 외곽이 나타난다. 도시 초입의 가도에는 고목이 울창하고 숲 그늘이 해를 가린다. 새로 개발을 했는지 건물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모두 물로 씻어낸 것 같이 깨끗하였다. 요소요소에는 이곳의 치수를 자랑하는 건조물과 붉은 큰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이 도시는 성도에서 57킬로미터 떨어진 민강岷江의 중상류와 타강沱江이 갈라지는 곳에 있다. 이곳은 전국시대 진소공秦昭公(전306-전251)때 촉의 군수 이빙李冰과 그의 아들이 도시의 서쪽 옥루산玉壘山 아래 민강에 제방을 세운 수리공정으로 취락이 발달하여 이루어진 오래된 도시이다. 오랫동안 관주灌州 혹은 관현이라 불리다가 1988년에 처음으로 도강언 시로 되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갑자기 잘 포장된 산길로 접어든다. 민강을 끼고 서있는 옥루산이다. 구불구불 산머리로 올라가 고풍이 창연한 누각 진언루秦堰樓 앞에서 내렸다. ‘세계 문화유산 - 도강언 풍경구’의 푯말이 고압적으로 사람을 반긴다. 그리곤 엄청난 입장료에 실색한다. 물론 여행사와 계약할 때 입장료가 90위안이라며 여행약정금에 포함되어 있다기에 ‘설마 그 만큼이나’하는 의구심이 있었으나 와서 보니 사실이었다. 누각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강택민江澤民이 커다란 글씨로 ‘과학적 치수의 창조를 선례로 화하華夏문명의 보물을 만들자.’며 중국 사람의 자긍심과 분발을 부추긴다. 누각 안의 넓은 공간에는 옛날 이빙 부자의 물막이 공사를 하는 공정의 거대한 벽화 <고언방수도古堰放水圖>가 당시의 모습을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었다. 경관루景觀樓에 와서 민강을 내려다보려니 많은 사람들 어깨 너머로 흙탕물만 겨우 보일 뿐 뾰족하게 치켜든 처마 장식만 눈에 들어온다. 경관루에서의 완상을 포기하고 포장이 잘 된 호젓한 돌길로 내려오다가 조용하고 전망 좋은 곳에 서서 민강을 내려다보았다. 흙탕물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제법 도도하고 질탕하게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도강언의 전모인 어취漁嘴,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의 중심 공정이 한 눈에 들어왔다. ‘흐름을 나누어 강물을 인도하고, 둑을 쌓아 물을 끌어들인다.[分流導江, 築堰引水]’는 계획으로 이 공정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과학적으로 물을 다스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그 기능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댐도 없이 물을 끌어들여 자연적으로 모래를 걸러내고 물을 배출하는 방법을 응용하여 천고千古동안 진흙이 쌓이지 않는 그 신비로움이 기이하다. 그렇기에 고대 수리시설로서의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기술상의 우수함까지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보는 이곳에서 사방을 돌아보며 ‘금강의 봄빛은 천지를 덮어 싸고, 옥루산의 뜬 구름은 세월 따라 여전히 변하노라.[錦江春色來天地, 玉壘浮雲變古今-<登樓>중]’라고 심회를 풀었건만, 그 과학적 기능은 고금에 변하지 않음을 갈파하지 못했으니 역시 철저한 인문학 체질인가보다. Ⅲ. 강에 연한 산길을 계속 내려오니 등성이에 이빙과 아들 이랑二郞을 기리는 사당 이왕묘二王廟가 있다. 이곳은 앞에는 민강, 남으로는 청성산이 있어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원래 이곳에 촉왕 두우杜宇를 망제望帝로 높여 제사지내는 망제사祠를 두었다고 한다. 한때 ‘귀촉도歸蜀途’로 유명한 두우의 넋을 기리는 사당 자리였다는 소리를 듣자 두견새 고사가 머릿속에 맴돈다. ‘두우가 죽어가는 별령鼈靈을 살려주고 벼슬까지 주었더니 이 배은망덕한 놈이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고 두우를 쫓아냈다. 두우의 원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으며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서정주徐廷柱님이 이 고사를 원용하여 <귀촉도>라는 애잔한 시를 남겼으니.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 만리 (중략)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남조南朝 제齊에 와서 망제사를 이웃 비현郫縣으로 옮기고(494), 이빙의 사당으로 바꿔 숭덕묘崇德廟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이빙에게 쫓겨난 것은 아니지만 죽어서 망제가 되어 또 한 차례 내쫓기는 아픔을 당하고 말았으니! 지독히도 팔자가 사나운 사람인가 보다. 송대에 와서 이랑二郞의 소상을 그 아비와 같이 두어 합사하였고, 나중에 칙령으로 부자가 동시에 왕에 봉해지자 비로소 이왕묘라 했다. 중국 역사에서 왕이 아니면서 왕으로 추봉된 인물이 과연 몇이었던가? 공자와 관우 그리고 송의 민족 영웅 악비 정도일 것이다. 더군다나 부자가 동시에 왕으로 추봉된 예는 전무하다. 이들 두 부자는 뛰어난 애민정신과 과학정신으로 함께 왕이 되어 만고에 높임을 받는 영예를 얻은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청대에 중수한 것으로 전각들은 산세에 의존하였기에 높낮이가 가지런하지는 못하였지만 지붕의 붉은 처마는 날아갈 듯 우뚝 솟아 자못 그 기세가 장관이었다. 대전大殿의 양쪽에서 흐뭇하게 민강의 자기 작품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는 이왕 부자의 소상은 그 인물 묘사도 자못 생생하였다. 후전後殿에는 현대화가 서비홍徐悲鴻이 그린 천마와 장대천張大千이 그린 옥녀玉女 등이 마치 살아있는 듯 달려 있었다. 중국을 다니면서 여러 고건축을 찾아보았지만 이 사당 안만큼 편액이나 주련 그리고 비문이 많은 곳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틈만 있다면 한 마디씩 칭송의 말을 정성들여 혹은 신나게 갈겨 놓았다. 안의 붉은 담장 벽 앞의 비에는 소위 치수의 <삼자경, 육자결三字經六字訣>, <팔자진언八字眞言>이라고 말하는 ‘여울을 준설할 때는 깊이하고 둑을 만들 때는 낮게 한다.[深淘灘 低作堰]’, ‘물굽이를 만나면 모서리를 다스리고 물길이 곧은 곳은 가운데를 뽑아낸다.[遇灣裁角 逢正抽心]’라는 역대 치수의 경험적인 원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밖에도 청 광서제의 친필과 역사상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 등 폭넓은 시대의 명인의 작품이 다 구경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 나의 눈을 두드러지게 끈 것은 대전 앞마당에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 흰 가림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천출신 권력자 등소평鄧小平의 ‘만대에 복락을 누리게 만들다.[造福萬代]’라는 글씨와, 근래 중국 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문화사가인 여추우余秋雨의 글 <도강언> 중의 첫 문장 한 부분을 그대로 새겨 넣은 돌비였다. 여추우는 <문화고려文化苦旅>의 도강언 여행기 첫 머리에서 “나는 중국 역사상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공정은 만리장성이 아니고 도강언이라고 생각 한다[我以爲, 中國歷史上最激動人心的工程不是長城, 而是都江堰]”라고 결론부터 내려놓고 글을 시작한다. Ⅳ. 산문山門을 벗어나 강가로 내려오면서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이왕묘의 웅장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특히 화려한 산문이 아름다웠다. 삼층의 날아갈듯 하늘을 향하여 날렵한 지붕에 올라있는 채색된 용과 물고기 그리고 악기를 든 동자상이 멋있었다. 특히 민국시대 장군 풍옥상馮玉祥이 내려쓴 금색의 ‘이왕묘’ 현판은 엄정한 예서로 힘이 실려 있었다. 그 사이로 푸른 이끼가 잔뜩 낀 고풍의 골기와도 옥루산을 배경으로 보기가 좋았다. 드디어 강가로 내려섰다. 옛날에는 다리가 이왕묘 바로 앞에 있었다고 한다. 송대에 처음 만들었다가 명 말에 부서진 것을 청에 와서(1803) 다시 나무를 펼쳐놓고 돌판으로 기둥을 삼아 자죽慈竹으로 밧줄을 꼬아서 연결하여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가설하였다. 그 후 1973년 외강의 수문을 만들면서 현재 자리인 하류 쪽으로 100미터 옮겼다. 지금은 대나무 끈 대신 강철 끈을 사용하고 나무와 돌 대신 철골과 콘크리트를 써서 만들었지만 원래 다리의 풍모를 거의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을 온 것처럼 안내원을 따라 열을 지어 안란교安瀾橋를 향해 갔다. 강과 산 사이에는 제법 넓은 길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길 옆 산 쪽에는 고대에 방수사업을 할 때의 돌을 얽는 구조의 모형을 만들어 놓아 이해를 일목요연하게 돕고 있었다. 구조물이 끊기는가 싶더니 또 조그만 사당이 나온다. 사당 앞 길가에 백옥같이 흰 부부가 서로 정답게 손을 맞잡고 마주 서 있었다. 좌대에는 ‘하선덕何先德 부부상’이라 적혀 있고 그 아래에 ‘1980년대에 부근에서 출토된 <하선덕묘명墓銘>에 의하면, 여기 나루터에서 배가 자주 뒤집혀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곳에서 훈장을 하던 이들 부부가 이를 보다 못해 모금을 하여 삭교를 놓았다. 이듬해 준공이 되자 안란교라 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혹은 부부교夫婦橋라 부르기도 했다’라고 부연설명이 되어있었다. 곧 안란교에 왔다. 다리는 높이가 13미터이고 길이가 340미터라나. 강의 동안에서 내강을 건너 인공 섬으로 연결되며 다시 외강을 건너 강의 서안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중국 특유의 누각 문처럼 생긴 입구를 지나 다리에 오르니 다리의 흔들림이 아주 심하다. 얼마 안 가서 내 앞에 한 퉁퉁한 노파가 겁이 나서 설설 기는 바람에 주춤거려야만 했다. 흘낏 보니 칠순은 넘은 것 같았다. 측은하여 늙은인데 어떠랴 싶어 팔짱을 끼고 부축하여 건넜다. 내 팔에 무게가 전하여져 오는 것으로 봐서 크게 의지를 하는 것 같았다. 혼자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이 노인장 팔자가 늘어졌구먼, 이 나이에 여행까지 다니고.’ 말을 걸어본다.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잘 모르는 곳이다. 아마 사는 동네 이름인 것 같았다. “어디에 있는 곳이죠, 사천?” 맞단다. 동네 노인들 끼리 단체로 왔다고 한다. 괜스레 나이도 물었다. 깜짝 놀랐다. “리우쓰 이.” 예순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불과 나보다 두 살 더 많은데 이렇게 늙어보이다니. 젊었을 때 정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연민스러워 하는 나에게 노파가 “어디서 왔느냐?”고 되묻는다. ‘한국인 여행객’이라니까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고 말문을 닫는다. 다리를 건너 내강과 외강 사이에 있는 섬에 이르러 내가 헤어지며 인사를 해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대꾸도 없이 못 본 척 일행 속으로 가버린다. 어이가 없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아마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는가봐!’ 문득 연전에 산동의 제남濟南에서 청도靑島로 가는 기차의 침대칸에서 한국인이라니까 지독히도 못마땅해 하던 50대 후반의 사내가 생각났다. 혹시 이들 아버지들이 한국전쟁에서 궤멸당할 때 같은 부대 소속은 아니었겠지! 너무 위태로운 결론일까? Ⅴ. 안란교를 건너 상류 쪽으로 얼마쯤 걸어가니 인공 섬의 북단이 나왔다. 설치해 놓은 난간에 서서 상류를 바라보니 흙탕물이 세차게 흘러온다. 바로 밑을 내려다보니 마치 물고기 머리 부분과도 흡사한 인공 제방이 민강을 내강과 외강으로 나누어 놓고 마주 흘러오는 강물을 맞받아쳐서 내강 쪽으로 내몰고 있었다. 기특하게도 성난 물살이 양순하게 말을 잘 듣는다. 그 때문에 외강 입구에 만들어 놓은 갑문 앞쪽은 바닥이 거의 드러나 있는 형편이었다. 바로 어취였다. 어취란 물고기 주둥이란 뜻으로, 민강 한 복판에서 물을 나누는 거대한 인공 제방으로 마치 한 마리의 긴 고래가 강을 거슬러 누워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외강으로는 모래를 걸러내고 방수放水하도록 하였으며 내강은 물만 흘려보내 관개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정말 2천여 년 전의 대단한 아이디어였다. 관광 유람차를 타고 강을 따라 길쭉하게 만들어진 인공 섬의 동안에서 강의 하류 쪽을 따라 어취와 보병구 사이에 있는 비사언으로 갔다. 비사언은 인공 섬의 남단에 축조된 넓이가 2백여 미터나 되는 홍수 방지용 수로로서 홍수로 물이 불어날 때 넘치는 물을 빼돌릴 뿐 아니라 또 대량의 진흙과 토사 및 자잘한 자갈을 외강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래자갈이 날아가듯이 지나가는 제방이란 뜻의 이름을 얻고 있었다. 비사언과 마주보는 곳에 보병구가 있었다. 보병구는 강의 동안에 있는 옥루산의 한쪽 산등성이를 인공적으로 파서 물이 내강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입구로 모양이 마치 병의 목과 비슷하여 보병구라고 부른다. 많은 물들은 보병구 앞에서 세찬 분말을 만들며 서로 사천 평원으로 나가려고 굉장한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비사언의 수로에는 얕은 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옥루산을 파면서 내강의 반대쪽으로 떨어져나간 조그만 절벽의 산 일대를 이퇴離堆라고 한다. 내강의 많은 물이 여기에 오면 이퇴의 돌출부분에서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비사언을 따라 외강으로 빠져 나간다. 그래야 물이 보병구로 과다하게 넘쳐 들어가는 폐해를 막는 것이다. 어취, 비사언 그리고 보병구의 탁월한 공정기술은 물을 끌어들여 농토를 관개하고 물길을 갈라 홍수의 재앙을 없애는 훌륭한 효과를 얻었다. 과거에 홍수와 가뭄이 극심하여 살기가 어려웠던 척박한 사천 땅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서 도강언이 만들어짐으로 인해 천부天府의 땅으로 풍요로워진 것이다. 지금까지도 약 6만 정보가 넘는 면적을 관개하여 사천 대평원의 농업 생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 경제 성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이 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이빙과 같은 이의 환생은 꼭 필요할 것이리라. 비사언에서 외강 쪽으로 조금 가서 조그만 출렁다리를 건너자 이퇴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원은 온통 꽃으로 치장되어 화사하면서도 깨끗하게 꾸며져 있었다. 언공도堰功道라 이름 지은 꽃길 사이사이 곳곳에는 분수가 솟아올라 시원상큼함의 청량감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 길 가에는 이빙 부자부터 제갈량 등을 거쳐 청의 정보정丁寶禎에 이르기까지 도강언의 제방을 중수하여 물길을 다스린 공이 큰 역대 명名목민관의 석상이 나이 순서대로(?) 죽 늘어서서 지나는 사람들을 사열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게는 2천 년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희한하게 외모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했다. 아하! 죽으면 나이를 먹지 않는가 보았다. 내강 쪽으로 있는 조그만 못인 복룡담 옆에 복룡관伏龍觀의 3층 누각이 높고 준엄하게 서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빙 부자가 치수하기 위해 제방을 쌓을 때 방해하는 용을 항복시켜 복룡담에 가둔 것을 기리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라고 한다. 아직까지도 갇혀 있는가 싶어 연못을 휘둘러보았으나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오리무중이다. 맞다. 이놈도 이 무더위에 물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만 혼자 땀을 찔찔 흘리고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봐도 서글프기 짝이 없는데. 40여 개의 돌계단을 지나 복룡관의 전전前殿으로 올라간다. 전 앞에는 장방형의 넓은 뜰이 있고, 돌기둥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각각 푸른색 사자와 흰 코끼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대전에는 높이 약 3미터 정도 되는 이빙의 석각상이 있었다. 1974년 수리할 때에 민강의 강심 깊은 곳에서 발굴된 것이다. 그 왼쪽에는 약 2미터 높이의 머리 일부가 떨어져나가 부서진 석인이 두 손에 삽을 들고 서 있었다. 이빙의 아들 이랑일 것으로 보고 있단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이어가기 위해 머리가 터져도 삽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른쪽에는 비룡이 그려져 있는 무쇠 정鼎이 있었다. 당나라 때 조성된 것이라 하는데 솥에 붙어있는 여덟 마리 비룡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그저 솔솔했다. 어떤 놈은 구슬을 희롱하며 날고, 다른 놈은 입을 벌려 삼키면서 날고 혹은 유유하게 조용히 날고 혹은 머리를 들고 날려하고 등 각양각색의 재미있는 모습으로 금시라도 솥에서 뛰쳐나올 듯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었다. 겁도 없이 용을 어르면서 즐거워하였다. Ⅵ. 복룡관의 제일 높은 곳 관란정觀瀾亭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도 솔솔 불어와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잠시 무료하게 앉았다. 멀리 안란교와 어취가 보인다. 이를 마주보고 있으려니 여추우가 도강언을 중국의 자랑거리이자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만리장성과 비교하여 평가한 글이 떠올랐다. 그 글에서 여추우는 ‘만약에 장성이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고 한다면 도강언은 실재로 요원한 시간을 차지했다. 그래서 장성은 사회적 기능이 일찍이 소진되었으나, 이곳은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민중에게 맑은 물을 보내주고 있다’고 하면서 ‘장성의 문명은 하나의 딱딱한 조각과 같은 것이고, 이곳의 문명은 살아 움직이는 생활이다’라고 극찬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곳이 있었기에 제갈량과 유비의 웅대한 재략이 있었고 이백과 두보 그리고 육유의 사천에서의 화려한 시문이 있을 수 있었다’고 중국의 인문까지도 결부시킨다. 그렇다. 이곳은 중국의 과학정신과 거기에서 파생된 인문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정해진 출발 시간이 다 되어가 이퇴공원을 빠져나왔다. 넓은 광장 한 모롱이에 내가 타고 온 버스가 보이고, 광장의 왼편에는 내강 옆에 ‘남교南橋’라는 현판을 단 역사가 오래고 결구가 교묘하게 짜인 건물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고전 건축으로 지붕의 조각과 그림이 휘황하다. 내강을 건너는 다리의 현란한 입구이리라. 발길을 그쪽으로 돌리려고 하니 버스 옆에 서있는 안내원이 손짓을 한다. 하는 수 없이 약간의 적당한 미련도 아련한 추억을 불러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하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 기회로 넘겨버리고 말았다. 도교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지는 청성산靑城山으로 향하면서도 2천 년 이상이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이빙의 선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정치는 물을 막히지 않고 흐르도록 하여 백성에게 재난을 없애주고 기름지게 해주고 부드럽게 길러주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실행이었고 이를 통해 실현한 구체적이고 소박한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다스림이었다. 우리네도 이런 막힘없는 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일터. 물을 막지 말고 그 흐름에 따르는 삶, 그 상선약수의 냄새라도 맡기 위해 오늘 내가 청성산으로 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교약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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